이현지 《목적지 없는 산책길》 전시 서문




2025. 10. 11  - 10. 19
예술공간 광명 시작,경기 광명시 일직로 17 IKEA 광명점 P1

작가: 이현지
디자인: 정지은
사진: 최철림
후원: 광명문화재단
(2025 광명문화재단 청년예술인 지원사업 선정 전시)




흩어지는 그림과 그들이 흐트러진 현장이 여기 있다. 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바퀴 달린 캔버스가 놓인 이현지의 개인전 ⟪목적지 없는 산책길⟫을 설명하기에 앞서 ‘길’과 ‘연기’에 관한 이야기를 달아본다.

움직이는 길 찾기
먼 옛날, 순례자들은 바람이 불면 지형이 바뀌는 사막에서 태양과 별을 기준으로 길을 찾았다. 지형지물을 기준으로 방향을 찾는 행위(Landmark Orientation)는 나무나 암석처럼 고정된 물체가 있는 경우에는 가능하지만, 바람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사구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이들은 변화무쌍한 땅 위에서 목적지를 찾기 위해 몇 없는 지형물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순례자들이 랜드마크로 여기는 자연물-태양과 별-조차도 사막처럼 일정한 시차를 두고 이동하기 마련이다. 흩어지는 땅 위에서 하늘을 보고 이동하는 순례자들의 눈은 저 멀리 떨어지고, 날이 어두워지거나 밝기 전에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이쯤에서 연기라는 또 다른 물질을 상상해 보자. 연기는 불의 증명이자 결과인데, 이는 기호로 나누는 대화이기도 했다. 원거리에서 연기는 방랑자들에게 막연한 목적지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피어오르는 연기, 그리고 변화하는 길은 이현지가 이번 전시에서 구축하는 전시에서 ‘연기 같은 길’에서 교차한다.

유랑하는 지도
일반적으로 전시 공간의 초입에서는 플로어 맵(floor map)으로 불리는, 전시 공간에 기반한 지도가 제공된다. 텅 빈 전시 공간에 걸린 작품은 플로어 맵 위에서 이정표가 되고 관객에게 일련의 전시 동선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관객은 전시장에 들어서면 익숙한 플로어 맵 대신, 바퀴가 달린 몇몇 작품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맞닥뜨린다. 특정 시점에 입장한 관객은 작품을 이동시키면서 다음 관객의 관람 순서를 조정한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의 전시 동선을 스스로 조율하면서도 다음 관람에 영향을 주는 감상을 유도한 것인데, 전시장에서 이정표 역할을 하는 작품을 능동적으로 움직이면서 다음의 길을 틔우게 한다.
이러한 감상의 방법은 이현지의 일상에서부터 출발한다. 작가는 ‘연기’나 ‘수증기’가 폭발 이후에 발생한 현상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강한 압력을 받거나 화학의 반응으로 폭발하는 현상은 현실에서는 목격하기 어려운 사건이지만, 작가는 반복적으로 흰 연기가 오르는 장면을 구성하며 감정의 분출과 확산을 떠올린다. 작가의 회화에서는 대체로 폭발의 근원으로 예상되는 구덩이에서 연기가 발생하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화면 위에 뿌려진 물감, 연필로 그려 남은 드로잉이 한 데 섞여 거친 폭발의 사건과 연결된다. 폭발이라는 강력한 사건과 달리, 구덩이 위에서 상승하는 연기는 비교적 고요해 보인다. 평화로운 일상의 길을 산책하며 상상했던 강렬한 마음은 폭발 흔적을 담은 작가의 회화와 공명한다. 파괴적인 감정은 이정표가 없는 무화된 길로 작가를 유도해 왔다. 길잡이 없는, 연기 같은 길을 걸었던 경험은 그렇게 현장에서 동선을 바꿀 수 있는 전시를 구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낚아챈 마음
한편으로 작가는 미결의 감정들을 연기에 비유하기도 했지만, 그 응축된 마음을 빠르게 담아낼 수 있는 드로잉을 다수 남겨왔다. 일상적 사물에 직관적 감상을 덧대 사물을 과장해서 표현하거나, 사물의 쓰임새와는 관련 없지만 떠오르는 문장을 적어 넣은 드로잉이 그러하다. 작은 사이즈의 드로잉은 작가의 일상에서 낚아챈 장면이며, 보다 본능적이고 즉흥적으로 손을 움직인 결과물에 가깝다. 그렇게 완성된 드로잉들은 한 데 모여 작가가 바라 본 세계를 만든다.
산책로에서의 기억을 연기에 은유한 영역을 지나면 사용하고 남은 종이 팔레트를 재료로 삼은 드로잉이 걸려있다. 물감이 섞이고 남은 평면은 버려질 운명이었으나, 작가는 이를 드로잉의 재료로 소생시킨다. 비교적 선명한 대상을 담은 회화가 바깥에 전시되어 있다면, 이 드로잉들은 그로부터 외따로 떨어져 액자에 끼워져 있다. 약간의 손길이 덧대어진 팔레트는 뭉그러진 추상으로 완결된다. 어지럽게 남은 물감 자국은 앞의 작품들과는 또 다른 폭발을 연상시킨다. 산책하며 발견한 찰나의 사물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남겨 온 과정과 함께, 팔레트 드로잉들은 작가의 사려 깊은 관찰의 행위에서 출발하였다. 분출에 잇따른 감정의 소멸이 작가의 상상이라면, 일상에서 그려진 드로잉과 그림을 그리고 쓰다 남은 종이 팔레트들은 폭발이라는 상상의 사건과 그림을 그리는 현실 그 중간에서 파생된 결과물이다.
홀로 폭발과 소멸을 상상하며 걸었을 한 산책로는 흰 연기가 되어 캔버스에 남는다. 작가가 길을 걸으며 느꼈던 혼란함은 풍경으로 정리되어 전시 공간을 배회한다. 스스로 길을 만들어갈 수 있는 이곳의 방문객들은 각기 다른 플로어 맵을 구성하면서 혼란을 자유로서 경험한다. 그리고 이따금 심어진 듯한 길가의 풀처럼 새어 나온 드로잉들을 마주한다. 이현지는 밖에서 마주치는 사물들, 특히 그늘진 것들을 조우한다. 그들의 처지를 대변하듯, 빠르게 남긴 그림과 글씨의 드로잉은 변화하는 길 위에 선 또다른 산책자를 만난다. 작가가 그늘의 사물에게 건넸던 것처럼, 또 한 번 따뜻한 사려의 눈빛을 기다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