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9.19 - 09.28
방도, 서울
작가: 박현주, 이난주, 이채윤
디자인: 이난주
Aging to∙∙∙
‘식물, 동물, 기체, 액체는 탄생과 소멸에 있어서 다소 빠르게 돌아간다. 돌의 큰 바퀴는 우리에게는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고, 비록 이론적으로라도 우리는 그것의 오랜 풍화 단계의 한 부분만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돌을 인간의 눈에 지속과 무감동의 상징으로 삼는 일반적 의견과는 반대로, 돌이 실제 자연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형성해 나가지 않고 끊임없이 죽어가는 유일한 사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¹’
프랑시스 퐁주의 묘사에 따르면 돌은 끊임없이 죽어간다. ‘끊임없이 죽어간다’는 말은 모순적이다. 죽음은 그 자체로 끝을 의미한다. ‘죽어간다’라는 말은 죽음에 보조동사 ‘간다’가 결합한 단어로,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이 끝없이 반복되는, 현실 세계에서 일어날 수 없는 현상처럼 읽힌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순차적인 시간과 더불어, 우리는 대부분의 것들에 관해 시작과 끝을 상상한다. 자연물에서부터 인공물까지, 인간의 손으로 조직하고 해체하는 물건들을 포함해 인간 이전에 살아왔던 존재들에게도 소멸은 불가피한 사건이다. 생명이 소진된 상태 즉, 사체로부터 서서히 생명이 닳아서 사라지고 있었음을 짐작하기도 한다. 죽음으로 이행하는 일직선의 흐름 속에는 계절에 따라 상태를 변화시키는 순환의 규칙이 내재한 경우도 있다. 그 미세한 규칙은 인간이 눈으로 관찰하려 해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별개의 세계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거대한 규칙 속에서 표면을 변화시키는 자연물을, 우리는 오직 우리에게 주어진 한정된 감각 기관으로만 목격하는 것이다.
자연물은 제 스스로 모습을 변화하고 근처의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주고받는다. 인간의 것과 다르게 그들에게 주어진 각각의 시간은 망막을 통해 관찰되거나 손을 거쳐 편집된다. 전시 ⟪톡틱톡⟫에 참여하는 박현주, 이난주, 이채윤은 물과 나무라는 자연물에서 출발했지만, 관찰자와 별도로 흘러가는 그들의 시간을 다룬다. 우리의 눈이 포착할 수 없더라도 ‘끊임없이 변화해 간’ 물질이나, 자연물 스스로만 기억하고 있었을 순간, 그리고 인간에 의해 끊겨 버린 시간이 이곳에 머무른다.
박현주의 <Circle>은 적양배추 물을 추출해 한지에 발라 건조하여 만든 대지 위에 얼음을 놓은 작업이다. 계단 구조물 위를 타고 흐르는 종이 위에서, 얼음이 녹아 만드는 물은 작가가 제작한 리트머스 종이에 반응하여 통제할 수 없는 무늬를 만든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설치된 종이 위에는 중력의 영향으로 물이 고이고 내려가는데, 얼음의 소진이 만드는 길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 형체는 갈고 닦여 고르게 나지 않고 불규칙적이다.
박현주는 몇 해 동안 이렇게 직접 리트머스 시험지를 제작하고, 그것이 물이 닿았을 때 종이 위에 드러나는 형상을 실험해왔다. 이러한 과정에서는 작가가 직접 성북천, 도림천, 청계천 등 서울에서 강이 흐르는 지역을 답사하며 직접 물을 수집하는 행위도 포함되어 있었다.² 서로 다른 장소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모아 작업실에 돌아온 다음, 그 반응을 설계하는 것은 실험자의 태도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부터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 킬(Kiel)에 체류하게 되었는데, 이주로 인해 작가는 본격적으로 채수(採水) 하지 않아도 쉽게 독일의 숲과 강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에 놓였다. 이러한 거주지의 이동은 전시에서 <경사로>로 드러난다. 동일한 주제의 <Circle>에서는 계단 구조물의 낙차로 인해 물이 스며드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면, <경사로>에서는 작업 공간과 작가가 작업의 재료와 주제로 삼아 온 장소 사이의 짧아진 거리 변화가 담긴다. <경사로>는 킬의 어느 숲에서 적양배추를 우린 거대한 천을 개울에 띄워 변화한 색이 드러난 작업이다. 강이 흐르는 곳에 방문해서 물을 긷고, 작업실에 가져와 얼음을 얼리는 수고로운 과정이 생략되었고, 물 반응 실험과 작업이 진행되는 장소가 일치된, 즉 경사로처럼 평평해진 상황에 맞추어 설치된 작품이다. <Circle>과 <경사로>에서는 물의 흐름을 관찰할 수 있는 조건을 제외하고 작가의 개입이 최소화되었는데, 박현주의 설치는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일련의 시간 중, 관객이 전시 기간의 일부만을 관찰에 쏟고 있음을 안내한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간 이후에도 얼음은 종이를 적시고 색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짐작을 남긴다.
나무 표면의 미세한 운동은 그것이 경험하는 생애의 궤적이다. 이난주는 ‘번역’을 자신의 주요한 작업 소재이자 태도로 삼아왔다. 다른 언어를 쓰는 국가 사이에서 말을 옮기는 행위와 함께 번역의 대상은 나와 가까운 사람, 동식물, 그리고 사물이 될 수 있다. 작가가 주변 인물을 탐색하거나 식물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죽은 식물을 분석하는 행위는 본인을 제외한 바깥 환경에 닿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작가만의 번역은 견고한 스스로의 세계에서 벗어나와 이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넘어 그들과 동일시하기를 바라는 상호작용의 욕망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이난주는 길목의 플라타너스 표면 위에 종이를 대고 탁본을 뜬 다음, <플라타너스 다이어리>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작업은 순간마다 달라지는 나무껍질의 인덱스(Index)이다. 가로수는 언제부터 심겨 있었는지, 그리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미지의 시간을 흘려보내는 생명체이다. 작가가 종이를 대고 목탄을 사용해 거친 표면을 종이에 남기는 순간, 다음 날 다른 종이를 나무 위에 얹는 사이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추측일 뿐, 우리의 눈으로는 정확히 어떠한 풍화가 이루어졌는지 파악하지 못한다. 이난주는 그 나무를 관찰 대상으로만 두지 않고, 그가 노화하는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의 일부로 이해하며, 표면의 변화를 겪고 있는 플라타너스의 찰나를 박제한다.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나무의 표면을 복제하며, 작가는 플라타너스의 일기를 남긴다. 이 방법은 생명을 해치지 않고 인간이 담을 수 있는 단순하면서 사려 깊은 행위이다. 내부로 깊이 침투하지 않고서 가장 민감한 피부를 종이에 옮기며, 작가는 나무가 흘려 보내는 그만의 시간을 저장한다. 이는 어떤 것에 빗대어 은유하지 않고 나무의 존재와 시간을 인간이 볼 수 있는 형체로 번역하는 것이다.
이채윤은 사회 구조 내부의 이율배반적인 상황, 특히 같은 사건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사람들 사이 갈등 혹은 시간과 시스템에 지배받고 체계 안에서 무언가 혼란한 장면을 표현해 왔다. 또한 공업용 안료로 장지에 채색하거나 영수증 위에 드로잉을 하는 등 흔히 미술의 재료에서 벗어난 도구로 작업을 탐구해 왔다. 이렇듯 회화 재료의 영역을 모색하는 것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어 왔지만 작품의 일부가 될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시도였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생활에서 느끼는 작가의 불편함은 회화 재료로 적합하지 않을 수 있는 도구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보기에 좋은 가구를 위해 잘려 나가는 나무들은 그들이 뿌리내렸던 원래의 장소로부터 제거되고 곱게 다듬어진다. 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나무가 태워지고 잘리면서 서식지가 사라지기도 한다. 파편화된 목적은 효용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압축되고, 벌목이라는 파괴 행위를 거쳐 다다른다. 작가는 지난 몇몇 작업에서도 그래왔듯, 회화에서 벌목공을 뒷모습으로 묘사한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통해 작가는 자신을 관찰자로 남겨 두고, 완성된 편안함 이면의 사건을 포착한다.
작가는 전시장 방에 사진 인화 중 현상액에 담은 이미지처럼 <False Print>를 설치한다. 스테인리스 접시에는 실사 사진이 아닌 작가가 직접 그린 드로잉이 담겨 있다. <벌목 시리즈>에서는 일상에서 보이지 않는 현장을 담았다. 이 작업은 관객이 처음 방에 들어갔을 때의 기대를 무너뜨린다. 보이는 것과 경험이 불러일으키는 착각, 한정된 감각으로 마주한 현장의 반전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만들어진 익숙함이 우리를 가두는 현장을 구축한다. 한편, 작가는 영수증처럼 소비 환경에서 교환되는 종이에 그림을 그렸던 과거 작업처럼 <우편 드로잉>을 제작한다. 영수증이 구매의 증거로 기능한다면 우편 봉투는 그보다 더 사적인 이야기를 동봉한 껍데기처럼 보인다. 시간이 흐른 뒤 영수증 글씨는 희미해지고 드로잉만 선명히 남게 되듯, 우편 봉투는 그 안의 내용물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외피의 사물이다. 작가는 그를 드로잉의 배경으로 설정하고 무언가를 감춘 원래의 용도에서 그림을 지지하는 주요한 재료로 전환한다.
노화, 그것에 숫자를 매기면서 인간은 흘러가는 시간을 체험한다. 변화는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단서이다. 그러나 눈이 담을 수 없는 미세한 흔적도 있다. 때로는 인간의 손으로 그 시간을 단절시키고 생태계의 시간을 가속하기도 한다. ⟪톡틱톡⟫, 초침을 거꾸로 돌린 의성어로서 전시는 우리가 감지하는 선형적인 시간 바깥, 저만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죽어가거나 잃어버린 시간을 읽어보는 시도를 제안한다.
¹ 프랑시스 퐁주, 『사물의 편』, 최성웅 옮김, 읻다(ITTA), 2019, p.153
² 박현주 작가 노트 참조, 2025. 09.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