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행복 《Graphic Poem》 전시 서문




2026.04.03 - 04.26.
현대미술회관, 부산 수영구 망미동 409-11

작가: 박행복
포스터 디자인: 고등어디자인
전시 전경: 노푸름
주관 및 주최: 현대미술회관 

 

행복에서 행복으로


1. 행복한 이름
 박행복은 어느 날 자신의 이름을 ‘박행복’으로 바꾸었다고 불쑥 말했다. 본인을 박행복이라고 처음 소개했을 때는 작년 무렵이었다. 단단하게 들리는 성 ‘박’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결합해, 작가에게 행복이 더욱 밀착된 듯 보였다. 그러나 행복은 누구에게나 허용되어 있지만 언제나 느낄 수 없는 드문 사건으로 느껴왔다. 주변의 사람이나 사물이 촉발해야만 비로소 성립되는 공식처럼.
박행복은 정말로 행복을 그리겠노라 선언하는 작가가 된 듯, 행복 그 자체의 인간이 되었다. 그는 행복을 갈망하거나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오롯한 행복을 여실히 그려내는 이였다. 그렇게 박준형은 박행복이 되었고 비로소 자신의 그림과 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언어를 찾게 되었다.
 박행복이 되기 훨씬 전부터 그는 본인을 ‘화가’로 소개해 왔다. 우리는 화가라는 단어를 들으면 캔버스 앞에 붓을 들고 옷에 물감이 잔뜩 묻은 인물을 쉽게 떠올린다. 그게 바로 박행복이다. 화가라는 관념은 박행복의 이미지에 포개어지고 박행복은 화가로 불린다. 그는 거의 매일 손바닥만 한 드로잉북에 연필이나 펜으로 드로잉을 하고, 작업실에서는 팽팽하게 짜인 캔버스 천 위에 물감을 올린다. 대중교통을 오가는 사이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만 휴대폰을 활용해 드로잉할 때도 있다.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유통되었던 2012년 경 작가는 디지털 드로잉을 해왔지만 본격적으로 재개한 것은 ‘글자 그림’을 시작한 다음 부터다. 그의 글자 그림, 즉, 글을 그리는 행위는 캔버스나 종이 위의 격자를  메우는 여정의 반복이다. 그러나 우리가 습관처럼 사용하는 한글을 획으로 ‘쓰는’ 것이 아닌, 글을 ‘그린다’는 행위는 언어의 체계와 한글 표기법에 몰두해 가며 캔버스 프레임 속으로 들어 가는 지난한 과정을 포함한다.

2. 글자를 그리는 일
 박행복의 전시 《그래픽 포엠(Graphic Poem)》을 본격적으로 살피기에 앞서, 글쓰기라는 익숙한 행위를 떠올려 본다. 처음 한글을 배울 때 우리는 ‘획’을 배운다. 획은 글의 단위를 선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박행복의 그림에서 글을 이루는 단위는 ‘픽셀’이다. 단위가 ‘정도를 표현하는 기준’이라면, 하나의 단어에 얼마나 많은 획이 필요한지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응(ㅇ)’은 한 번의 획, ‘응’은 세 번의 획이 들어간다. 그렇다면 박행복은 이응을 표현하기 위해 몇 개의 네모를 사용하는가. 그는 한 개 혹은 마름모꼴로 배열된 네 개의 네모를 사용한다. 칸을 채우는 동시에 가운데를 비워 두며 글자를 그린다. 이것이 그가 이응을 그리는 방법이다. 언어의 힘이 공유 가능함에서 비롯된다면, 박행복은 글의 힘을 버리지 않고 간직한다. 때로는 형체를 알아내려 한참을 숙고해야 하지만, 어떤 문장들은 명료하게 읽힌다.
 전시 동선에 따라 《그래픽 포엠》을 읽어 내려간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현대미술회관 건물의 초입에는 〈매일 어제는 찾지 못한 가능성을 찾는 일〉이 있다. 이 작품을 비롯한 내부의 회화들은 그 자체로 박행복의 ‘행복한 그리기’를 암시한다. 억지로 행복해지려 되뇌는 최면도, 골똘한 고민 끝에 도출된 결과물도 아니다. 회화는 그림이 표출하고, 글이 서술하는 대로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혹은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향후를 향한 기대를 드러낸다. 전시장 입구에 반듯하게 걸린 이 그림은, 오늘을 위해 작가가 간직해 온 소중한 태도를 꼼꼼히 곱씹게 만드는 안내문이기도 하다.
 박행복은 지난 전시부터 꾸준히 작품이 놓일 공간을 작은 목업(Mock-up)으로 제작해 왔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목업을 쌓는 행위는 ‘원고지를 만드는 일’¹이다. 선명한 플래시(Flashe) 물감이 덮이기 전, 희미한 흑연이 남긴 격자 역시 원고지를 그리는 과정과 같다. 충만한 내용의 진입을 앞둔 깨끗한 원고지는 작가에게 전시를 구상하고 글을 그리기 전 준비 단계다. 글이 쓰일 종이를 만드는 과정은 생경하나, 박행복은 입체적 공간과 평평한 대지라는 두 개의 밑바탕을 구축하며 그림이 남길 자리를 차분히 마련한다.
〈삶에서 삶으로〉는 목업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현대미술회관이라는 공간의 여백을 고민한 작품이다. 이 작업은 건물의 구조에 맞추어 설치되어, 관객이 문을 사이에 두고 안팎을 넘나들며 감상하는 동선을 유도한다. ‘삶에서’가 설치된 장소는 작품을 미결의 상태로 남겨 둔다. 박행복은 하나의 방에 각각 8개의 캔버스로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여 〈삶에서 삶으로〉를 그렸다. 전시 초입이나 다른 구간에서 하나의 캔버스에 한 단어를 담은 것과 달리, 형태소를 다시 한번 분해한 것이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벽 높이에 맞춰 설치된 그림은 공간의 제약상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관객이 공간을 이동하며 개별 캔버스를 눈으로 더듬는 순간에야 의미가 연결된다. 방을 넘어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문장, ‘삶에서 삶으로’. 이 문장은 관객의 동선과 더불어 조밀한 순간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우리’라는 삶, 그리고 그 삶이 일궈내는 내일의 대지를 드러낸다.
 신체 스케일을 압도하는 〈삶에서 삶으로〉가 있다면, 다른 벽면에는 띄엄띄엄 놓인 〈형용할 수 있/없는〉이 있다. 전시된 모습처럼 이 그림은 두 가지 가능성으로 읽히거나, 두 가지 여지를 모두 품는다. 감상이나 비평을 배제하고 특정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쓰인 글은 그 자체로 고정된 문장이 된다. 그러나 ‘있’과 ‘없’이라는 갈래로 나뉜 이 작품은 ‘글을 그린다’는 역설이 주는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글을 읽을 때 좌에서 우로 이동하던 시선은 ‘있’과 ‘없’에서 급선회한다. 두 글자는 서로의 보색으로 채색되고 ‘수’를 기점으로 작가가 유지하는 규칙이 변주된다. 규칙은 앞 그림의 배경색을 다음 그림의 글자 색으로 채택하며 이어지는데, ‘수’ 이후로 등장하는 ‘는’에는 그러한 규칙의 흐름이 해제되기 때문이다. 관형어 뒤의 명사가 생략된 자리에 관객은 ‘그림’이나 ‘삶’ 같은 단어를 대입하며 작가의 문장을 상상하게 된다. 보는 이는 문장을 맺는 역할을 누리며 그 뒤에 올 무수한 단어들을 연상한다.
〈물질과 행위를 통해 이 순간을 느끼는 일〉은 앞선 작품보다 더욱 작가의 그리기 태도를 명료하게 시사한다. 이 그림은 문장의 작성에 적용되는 약속을 되짚으며 제작되었다. 먼저 전경과 배경색을 교차하는 규칙이 유효하게 작용하여 낱말들이 이어진다. 그러나 각 캔버스는 글을 좌우로 읽는 관습을 비껴가기에, 관객은 부유하는 낱말들 사이에서 쉽게 잡히지 않는 글자 속으로 파묻히게 된다. 작가는 이번에도 현대미술회관이라는 공간의 눈높이와 스케일을 고려하며 메시지를 전송한다. 명확한 문장을 강요하는 대신, 글자와 맞닥뜨리는 그 순간 자체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전시의 시작이자 행복의 초입이었던 〈매일 어제는 찾지 못한 가능성을 찾는 일〉은 전시장 전체에 걸쳐 총 4개의 캔버스에 그려졌다. 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거나 시작과 끝에 배치된 이 작품들에 대해 작가는 "같은 시간대에 볼 수 없는 서로 다른 작품"²이라고 말한다. ‘가능성’에 대하여, 우리의 눈은 한 번에 하나의 그림만을 볼 수 있지만, 3차원을 초월한 세계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무화된 채 나열된 현장이 존재한다. 순간의 가능성을 토대로 미래를 점치는 막중한 선택이 가벼워지고, 무수한 가능성이 공존하는 상태이다. 그곳에서는 어제의 가능성이 다른 방식으로 해결된, 한결 가벼워진 오늘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4점의 회화는 '시리즈'라는 말로 묶이지 않는 개별적 가능성으로서 전시장 곳곳에 위치한다. 변주된 가능성은 유일무이한 다수의 해결책을 남긴다. 마지막은 다시 처음으로 연결되며 가능성을 좇는 하루가 반복되는 매일을 상기시킨다.

3. 쉽게 쓰여진 네모
 작가의 이름이기도 한 ‘행복’은 ‘찾는다’라는 서술어와 만날 때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이는 행복이 보편적인 감각이면서도, 누구나 쉽게 도달할 수 없는 희귀한 영역에 머물러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굳이 애써 찾지 않아도 편안하게 읽히는 그의 문장들은 일상 저변에 스며든 생각이다. 그리고 분절된 형태소와 격자 사이로 관객의 시선이 머물며 문장을 재구성하는 과정은 각자의 운율을 만드는 일과 닮아 있다. 박행복의 화면이 단순한 그래픽을 넘어 시(Poem)로 치환되는 지점은 이곳에 있다. 낱말 사이의 여백과 색채의 변주는 리듬을 만들고 캔버스 표면 위 시로 등장한다.
 누군가에게 이 전시는 '행복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면 어떨까. 그럼에도 전시는 무리 없게 읽힌다. 사람들 사이 평화가 깨지고 삶과 행복에 관한 실존적 의문이 인간을 뒤흔들던 시기에 행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열히 획득해야 하는 상태로 여겨졌다. 행복이 아직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 대신, 행복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냐에 관한 다소 비극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전시 바깥에서 이루어졌던 그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작가는 구태여 행복을 형상화하려 애쓰지 않고 누구나 쉽게 내뱉고 접할 수 있는 말들로 이루어진 삶을 차분히 걸어 간다. 명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쫓는 대신, 작가는 프레임 안을 나누고 채우며 화면 내부에 몰입한다. 타인을 의식하거나 외부를 참조하지 않고 오직 작가 자신으로부터 발화된 글과 그림은 지극히 친절한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행복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메마른 축 위에서 그의 회화를 다시 본다. 낯설지 않은 감각, 애써 꺼내지 않아도 늘 곁에 있는 마음. 이곳에서 적어도 행복이란 픽셀로 정성껏 그려낸, ‘쉽게 쓰여진 시’와 같은 박행복의 그림이 아닐까.




¹ 작가와의 대화, 2026. 03. 12.
² 작가와의 대화, 위와 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