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빈 개인전 《그린 듯한 그린》 리뷰




2025.11.01. - 11.16.
예술공간 의식주,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80 2층

작가: 이정빈
그래픽 디자인: 마카다미아 오
서문: 박소호
기록: 정지필
후원: 서울문화재단 2025 청년예술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


이정빈의 서체를 근면하게 탐색하기



1. 
 이정빈의 개인전 《그린 듯한 그린》의 작품은 명확한 정의를 유예시킨다. 그의 회화가 녹색(Green)보다 노란색에 가까워 보이는 것 같아도, 작가가 사과를 그렸음에도 모과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이정빈의 회화는 전체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를 그린 듯, 사과 혹은 모과, 초록 또는 노랑이 될 수 있는 어떤 면(face)을 보여 준다.
 ‘전시 보기’라는 경험을 복기하며, 이정빈의 개인전이 열렸던 지난 11월 예술공간 의식주에 걸린 초록색의 회화 사이에서 나는 그림의 대상이라는 수수께끼, 혹은 작업의 의도라는 정답을 찾으려고 했다. 작가는 정답 없는 서술형 문제를 내는 출제자와 같았다. 그렇다고 채점을 하는 평가자도 아니었다. 그는 어떤 것의 부품을 것을 던져두고 관조하는 듯했다. 관객은 끊임없이 전시의 주제나 작가의 의도를 파헤치려고 애쓰지만, 이정빈은 정답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함정을 파놓는 사람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정답을 치열하게 알아내는 대신, 시점을 거슬러 이정빈이 어째서 이런 문제를 출제하게 되었는지 파악하려는 성실한 관찰자가 되기로 했다.


2.
 <모래>, <흉골>, <늑골>, <무덤>은 전시장 콘크리트 벽에 수직으로 걸렸다. 간결한 디스플레이는 단단한 뼈를 이루는 입자인 모래가 무덤에 이르는 시간을 암시한다. 흉추를 연상시키는,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연결은 이정빈이 그동안 천착해 온 ‘뼈’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몇년 전, 특정 이미지에 씌워진 가치로부터 탈주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뼈를 선택했다. 온라인에서 관음적 대상이 된 운동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향한 불편함은 조깅하는 뼈의 동작으로 드러났다. 말끔하게 남은 뼈는 성별을 가늠할 수 없게 했다. 또한 전통적으로 죽음과 덧없음을 의미하는 뼈를 통해, 오늘날 성적 기호로 읽히는 몇몇 이미지의 잠재된 폭력을 사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뼈를 그리기 시작한 다음부터 작가의 회화는 골격계 사이, 몸과 몸 주변 환경을 함께 그리는 이차적인 흐름으로 나아갔다. 짧게 언급하자면, 작가는 2020년 경 여전히 관심을 두었던 몸의 움직임 그리고 크로스핏 경험을 다룬 회화를 그렸다. 이 때 뼈 틈새, 신체 사이에는 주변 장면이 침투하였으며, 이는 배경과 대상의 경계가 사라진 빠른 붓질의 회화로 남았다. 
 다시 전시로 돌아가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설치된 네 점의 회화는 이정빈이 과거에 한 획으로 뼈를 그려냈듯, 회화 네 점을 드문드문 걸어 골조를 드러낸다. ‘그린 듯한 그린’의 제목처럼 텍스트의 의미를 비튼 것은 이 작품에도 영향을 준다. 네 개의 작품명 중 ‘모래’는 뼛조각을 가리키고, ‘무덤’은 뼈가 은유하는 죽음을 내포한다. 뼛조각은 모래이기도 하고, 모래는 뼛조각일 수도 있는 등가교환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무덤’이라는 단어는 사건의 흐름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 사이 흉골과 늑골은 정확하게 그의 회화의 위치와 정보를 지시하는 중간 지대에 놓인다. 네 점의  ‘모래’, ‘흉골’, ‘늑골’ 그리고 ‘무덤’은 차례로 각각의 그림에 대입되고, 서사가 진행되듯이 척추의 꼴을 차근히 드러낸다.
 아울러 이번 전시에서는 시제와 동태를 변주한 제목의 작품이 등장한다. <사과>, <모과>, <아무 일 없던 사과>, <썩었고 먹었고 자랐고 그려진 사과>, <먹혔던 사과>는 하나의 소재를 다루지 않는다. 동선의 흐름에 따라 관객이 읽으려 애쓰는 작가의 의도는 배반된다. 이는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비-등방성(Isotrope)을 자아내며, 제목이 지시하는 이미지에 관한 믿음을 어긋나게 한다.¹ 다섯 점의 그림은 뼈에 관한 위의 네 점의 그림처럼, 회화를 따라 연속적인 차이를 만들어낸다. 무심하게 던진 듯한 제목과 표면을 스치듯 덮은 물감은 전시를 넘기며 이어진다. 교본처럼 붙들던 제목을 오래 보다 보면, 우리는 판단 불가의 상태를 마주한다. 여기에서 다시 이미지에 덧씌워진 판단과 평가를 거두기 위해 작가가 그렸던 뼈를 소환할 수 있다. 폴 세잔이 반복적으로 그렸던 사과를 떠올려 보자. 사과는 미술에서 기본적인 정물로 여겨진다. 가장 흔한 과일이면서도 실재를 끄집어내려는 소재로서 사과는 뼈와 같이 기본적인 사물로 쓰인다. 그러나 작가는 사과를 치밀히 해체하기보다는 초연하게 그것의 각도를 비틀고 확대하고 제목을 바꾸면서 사과가 아닌 어떤 것, 그러나 사과가 될 수 있는 무언가를 그린다.

3. 
 제목의 혼란함을 뒤로 하면 자유로운 붓질이 뒤덮인 녹색의 풍경이 드리운다. 여기에서 자유로움은, 명확한 지점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제자리의 움직임에 가까운 상태이다. 자유와 가능성, 열어젖힌 회화, 이정빈의 회화를 관통하는 정서는 이탈의 감각을 일깨운다. 이 그리기는 대상에 가까워지려는 욕망 바깥에서 붓을 들고 캔버스 위에 긋는 움직임을 강조한다. 제목과 텍스트의 의미로 작업을 묶어 두지 않고 그것을 거듭 반전시키며 자유롭게 풀어두었던 개념적 태도는 풀과 꽃을 그린 이미지 위에서 운동한다. 물체보다 물체 뒤에 맺힌 풍경을 그리고, 신체와 배경의 용해를 어지럽게 그린 기억은 실시간으로 대기의 영향을 받는 격정적 장면으로 반영된다. 움직임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고정된 이미지의 연속이다. 그들의 연결이 수평적으로 시간을 만든다면 이정빈의 회화는 수직적으로 겹겹이 포개어지며, 자유로운 붓질로 유영하는 회화로 탄생한다.

 회화를 두고 일컫는 움직임에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회화는 움직임(그리기)으로 만들어지지만, 회화 위에 남은 자국으로 손의 상하좌우 이동을 짐작할 뿐, 한 점의 회화로는 화가의 모든 손기술을 유추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회화는 고정된 사물로 인식되고, 또 전시장에서 성역화된 채 감상하는 태도는 회화를 움직임 바깥의 물체에 가두어 둔다. 움직임을 수반해 만들어졌지만 모든 동작을 낱낱이 드러내지 않는 회화는 꼿꼿하다. 그러니 이정빈의 회화를 두고도 형체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과정으로서, ‘비교적’ 자유롭다고 부를 수 있다. 자유로운 초록의 헤엄을 거쳐 전시의 중반(여기에서 중반은 물리적인 위치와 동선을 동시에 가리킨다)에는 숲을 그린 <두42>가 등장한다. 이 회화는 다른 작품에 비해 꽤 구상적인데, 작가의 시점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초록 풀더미가 우거진 <저녁>과 <뒤피 숲> 그리고 세로형 캔버스에 꽃과 풀이 엉켜 그려진 <두 집 앞>, <Poppies>가 걸려 있다. 이 작업들은 작가가 2024년 임성희 작가와 열었던 2인전 《타법打法》(2024)에서 공개된 바 있다. <저녁>과 <뒤피 숲>에서 작가는 뒤셀도르프의 숲을 그렸다고는 하나, 눈앞에 빼곡하게 들어선 붓질은 마치 잎의 표면을 가까이 확대한 것처럼 보인다. 그 밀착된 시선, 그리고 조금은 떨어져 바라보는 꽃 사이에 있는 <두42>는 전시의 흐름을 환기하듯이 멀리서 그려졌다는 점에서 낯설다. 이정빈은 이번 전시에서 유독 본인이 어떤 것을 바라 보고 있는지, 또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판단을 보류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공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있는 그림은 이 전시에서 작가와 관객의 시점이 일치하는 유일한 지점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여기서 작가는 도구를 이용해 물감을 흩뿌리고 문지르는 신체적 수행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관객은 ‘그려지고 있는 상태’의 에너지를 마주하게 된다. 연속되는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균열 속에서, 이 회화는 이정빈의 그리기-서체를 드러낸다.

4.
 사과, 뼈, 나무라는 ‘기본적’인 존재를 감상한 성실한 탐구자로서, 또 이정빈의 과거를 헤집으며 어떠한 경위로 그가 이러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를 떠올린다. 무거운 불편함은 가벼운 뼈가 되고, 그 뼈는 또다시 캔버스로 해체되어 나열된다. 이정빈의 작업은 명명과 기록이 쌓아 올린 틀을, 기본적인 소재와 텍스트를 활용해 무너뜨린다. 《그린 듯한 그린》에서 이정빈은 그가 본 것, 보려 하는 것, 그리고자 하는 것들을 기본적인 사물 뒤에 둔다. 그 대신, 사과 혹은 모과, 뼈로 읽을 수 있는 형체를 확대하고 거듭 돌려 두며 관객을 성실한 관찰자로 앉혀 놓는다. 하지만 전시에서 우리는 성실함으로 이 전시를 이해할 수 있을지에 관한 의문에 빠진다. 이정빈의 회화를 탐색할수록 어떤 것을 그렸다는 의도를 알아가려는 근면한 시선은 물감과 붓질의 교차에 머무르게 된다. 누군가가 남긴 글의 내용을 파고들려는 관성에서 벗어나 그의 서체에 주목하듯, 이정빈의 도래하지 않을 다음을 기다리며, 물감과 텍스트의 유희를 근면하게 추적하는 것이다.





¹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역, 1997, 동문선, p.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