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소각하며 Burning the Letter》
일시 | 2026년 7월 11일 (토) ~ 8월 2일 (일) 13:00 ~ 18:00 (월, 화 휴무)
장소 | 예술공간 의식주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80 2층)
기획 | 강다원
참여 작가 | 곽기쁨, 로렌리, 윤지현, 장새샘
포스터 디자인 | 이혜지
주관 및 주최 | 예술공간 의식주
후원 | 202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주체
일시 | 2026년 7월 11일 (토) ~ 8월 2일 (일) 13:00 ~ 18:00 (월, 화 휴무)
장소 | 예술공간 의식주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80 2층)
기획 | 강다원
참여 작가 | 곽기쁨, 로렌리, 윤지현, 장새샘
포스터 디자인 | 이혜지
주관 및 주최 | 예술공간 의식주
후원 | 202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주체
✳곽기쁨 작가의 〈초고〉에서 관객은 직접 종이를 물에 녹일 수 있습니다.
✳✳로렌리 작가의 작품은 빈티지 사슴 박제와 발견된 비둘기 사체를 활용해 제작되었습니다.
✳✳✳장새샘 작가의 엽서는 자유롭게 뒤집으며 읽어볼 수 있습니다.
이 전시를 시작하게 만들었지만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프란츠 카프카의 마지막 유언·편지에 관한 것이다. 카프카의 편지는 한 사람이 몹시 숨기고 싶던 생애의 부분, 혹은 그 전부, 그들이 합창하는 비밀과 취약함이 공개되었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또 다른 방향과 힘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했다. 마지막 편지가 지닌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그건 한 개인이 지닌 가장 나약한 모습과 강력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약속이 배반되자 카프카는 어쩌면 영원히 편안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시간 속에 갇혀 있는 듯했다.
그러한 점에서 카프카의 편지는 마지막 약속의 파기, 그것이 촉발시킨 것처럼, 돌발적 경로로 나아간 텍스트와 영원히 잠들지 못하는 누군가의 약점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유언의 자유', 인간은 자신의 최종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최종적 의사는 행위자가 사라진 후에만 효력을 지니고 법적인 생명을 얻는다. 죽음은 곧 탄생이다.¹ 유언의 시간은 죽음의 문지방을 밟고 시작된다. 이 역설, 발화자가 사라져야만 말이 비로소 힘을 갖는다는 것은 비단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연약한 비밀이 노출되고 타인에게 닿으며 다른 역학으로 전복되는 시점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비밀 역시 그것을 쥔 사람의 손을 떠나야만, 비로소 다른 무엇이 될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닐까. 취약함은 어떤 사건인 공개, 공유, 발언, 나눔을 통해 다른 성격으로 변환할 수 있을까? 변환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로 불특정한 사람을 향한 메시지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렇듯 성질이 변화하고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이유로, 사람의 깊은 곳에 위치한 취약함은 파고들 수밖에 없으며, 쓰일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취약함의 경로는 논리적이지도, 정합적이지도 않다.
《편지를 소각하며》는 연약함의 쓰임과 공개가 어떠한 전환점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질문 위에 세워졌다. 전시의 제목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프란츠 카프카의 마지막 유언, 즉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남겼던 편지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정작 이 전시의 제목을 이루는 '소각'은 실현되지 않았다. 브로트는 그의 모든 미공개 편지와 일기, 원고를 태워달라는 카프카의 부탁을 듣지 않았고, 그 결과로 우리가 잘 알다시피 『소송』(1925), 『성』(1926), 『아메리카』(1927)를 편집해 출간했다. 1939년 나치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해 브로트가 피신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도, 그는 몇몇 원고를 제외한 『소송』을 비롯한 주요 텍스트를 계속 보관했다. 이후 비서 에스데 호페(Esther Hoffe)에게 이 문서들을 공공기관에 넘길 것을 부탁했지만, 호페는 오히려 이 문서들을 판매했다. 시간이 흘러 호페마저 사망한 뒤, 기록들은 자녀에게 상속될 뻔했으나 소송을 거쳐 최종적으로 2019년 예루살렘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었고, 현재는 온라인으로 공개되어 있다. 문서는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세대에서 세대로 거치면서 본연을 뒤덮고 있던 취약함을 벗은 채, 가치 있는 문학 혹은 오랜 논쟁으로 얼룩진 문서가 되어 있었다. 소각을 거부당한 카프카의 문서는 그렇게 사라지지 않았고, 그의 생애주기와 함께하지 못했기에 오히려 아카이브로 남아 한동안은 영속할 것이다. 자신의 손을 떠난 텍스트 꾸러미가 알 수 없는 길을 향해 나아갈 때, 두려움은 존재의 증거가 되며, 비밀의 파기는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을까.
이번 전시에 참여한 네 명의 작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질문에 답한다. 곽기쁨이 취약함을 관객의 손으로 넘겨 '읽는 행위' 속에서 풀어내고 흩뜨린다면, 로렌리는 반대로 그것을 신체 내부에 봉인하여 겉과 속의 간극 속에 가둔다. 윤지현은 상처를 표면 위로 끌어올려 빛나는 흔적으로 남긴다. 그리고 장새샘은 그 흔적을 피부, 테두리로 확장한다.
곽기쁨은 ‘보는’ 행위를 둘러싼 질문을 던진다. 텍스트를 읽고 본다는 것, 나아가 이해하는 과정은 언어를 감각화하려는 시도로 연결된다. 예컨대 작가는 감온안료, 밀랍, 향 반죽처럼 환경적 조건에 따라 소멸하는 재료로 문장을 만들어 관객의 감상에 의해 변주되는 텍스트 기반 작업을 전개해 왔다. 이번 전시의 〈초고〉(2026)에서 작가는 수용지 위에 고백의 문장들을 썼다. 다른 사람에게 약점으로 보일 수도 있는 내용이 적힌 수용지는 관객에 의해 물에 분해된다. 작가의 손에서 타인의 손으로 이동한 취약함은 누군가의 읽는 행위를 통해 공유된다. 연약함은 다른 이에 의해 녹아 없어지며 해소되기를 바라는 소망, 다른 속성으로 재탄생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문장이 물에 풀려 형체를 잃는 순간, 비밀은 더 이상 누구의 것도 아닌 상태로 흘러간다. 눈이 쌓인 듯 어항의 바닥에는 녹은 종이가 아른거리고, 각각의 작은 비밀들은 흰 뭉치가 되어 아래로 가라앉는다.
로렌리는 신체 일부가 기능을 잃고 붕괴되는 듯한 감각에서 출발해, 이를 복원하기 위하여 박제 기술을 배웠다. 박제의 주된 과정 중 하나는 가죽을 벗기는 일이다. 몸 안과 밖을 구분해 주는 피부는 다시 배열된다. 작가는 이를 ‘물리적 형태를 갖춘 유령’²이라고 하는데, 온전한 겉과 달리 속은 텅 비어 있거나 다른 물질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에서 빈 곳은 열려 있는 곳이 된다. 로렌리의 〈Hickey〉(2026)는 바로 이 점을 이용한 작업이다. 박제된 비둘기 내부에는 작가의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점자 편지가 들어 있다.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점자를 알지 못했던 작가의 할아버지는 이 편지를 읽을 수 없으므로, 영혼만이 비둘기 내외부를 배회한다. 〈Tan Lines〉은 오래된 앤틱 사슴 박제물의 가죽을 뒤집어 제작되었다. 작가의 닭껍질로 만든 〈Girth of My Neck〉(2026)처럼, 피부를 뒤집고 그것을 다시 기우지만, 속은 모두 비어 있다. 떠나간 영혼은 치유할 수 없으며 한동안 공허할지도 모르는 마음이지만, 껍질을 다시 이어 붙이는 행위는 빈 곳을 그대로 보여주거나, 닿지 못하는 편지의 발신 함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윤지현은 장지에 채색 후 비단을 씌운다. 올을 풀거나 뜯는 작업을 통해 상처를 은유한다. 그의 작업에서 상처는 통증을 다른 감각으로 변환되듯, 별의 형태로 빛난다. 아이를 낳고 기른 지난 6년의 시간은 작가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아픔과 사랑, 미움과 애정, 힘듦과 기쁨, 자책과 보람. 극단의 감정은 아이를 ‘출산’한 시점부터 ‘배출’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윤지현의 말처럼, 본능으로 인식되는 모성이 아닌, 제어할 수 없는 사랑을 주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이다. 윤지현의 회화에는 별이 된 상처, 부처의 수인(手印) 너머의 풍경이 엿보이는 등, 상이한 이미지들이 중첩되어 있다. 어떤 기점을 넘어서, 감각이 이어지기 위해 남긴 흔적은 튼살과 흉터로 남는다. 이번 전시에서 윤지현의 작업은 전시장 곳곳에 설치되는데,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응시하는 구도로, 내밀한 상처들을 엿보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장새샘은 살아있음의 증명이면서 동시에 생의 징그러움을 드러내는 피부의 물성에 주목한다. 피부의 질감과 촉감을 연상시키는 양모로 펠트를 만든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생명체의 징그러움으로 보였던 작품은, 천천히 다가갈수록 포근하고 안락한 효과를 제공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마름모 모양의 펠트를 이어 붙이는 작품을 선보인다. 작가는 그간 탯줄을 통해 과거 연결된 기억을 추적하고 회귀하려는 욕망을 드러내 왔지만, 신작 〈사지로 꽁꽁 붙잡고〉(2026)은 비교적 현재 시점에서 출몰한 결과로 보인다. 한 겹의 펠트 조각은 하루 혹은 한 사람에 빗대어 진다. 장새샘은 주로 과거 혹은 원시적인 기억에서 출몰한 알 수 없는 불안과 트라우마를 다뤄 왔다. 〈탯줄로 지은 시〉(2025)와 함께 전시된 신작은 작은 하루와 세포의 군집, 즉 분절된 기억을 형성한다. 함께 전시된 〈허니문에서 부치는 편지〉는 작업 활동 전반을 둘러싼 개인의 사적인 기록을 보여 주며, 결과물 바깥에 놓인 작가의 일상에 관객을 밀착시킨다.
¹ 미쉘 그리말디·남효순, 「유언의 자유」, 『저스티스』, 147(2015), p.295
² 로렌리 작가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