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그림 《푸른 어둠 속 둥지 짓기》  전시 평론



2025. 03. 27  - 04. 19
수애뇨 339, 서울

작가: 김그림





푸른 새의 따뜻한 둥지로부터

부드러운 체험
 지구의 기온이 점점 상승할수록 생물들은 현재 위치보다 더 높은 위도에 서식지를 마련한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나라 동해에서 발견되는 상어처럼, 이국의 생물이 가까운 반경에서 발견되거나, 특정 지역에서 생존하던 동물이 사라지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식물은 어떨까? 계절에 따라 지역, 심지어 대륙을 횡단하는 동물과는 달리 식물은 고요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인식되어왔다.¹ 매순간 달라지는 날씨에도, 한 곳에 뿌리를 내린 식물들은 시간을 묵묵히 버티는 경이의 대상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식물은 분명히 제 방식대로 움직이는, 변화에 기민한 생물이다. 급작스레 이 땅에 출현한 외래동물이 경고등과 같다면 어느 순간 훌쩍 성장해있거나 자취를 감춰버린 식물들은 잔잔한 파도와 같은 위기로 감지된다. 그들은 사지(四肢)달린 생물과는 다른 방법과 속도로 위치를 옮기고 발아해 적응하고, 김그림은 그러한 흔적을 캔버스 위에 세밀하게 남겨왔다.
 오래전부터 남미나 시베리아 등 우리나라와 상반된 환경의 지역을 여행한 작가의 경험은 자연스레 회화의 소재로 용해되었다. 그는 여행객으로서 독특한 풍경을 옮기는 것을 포함해 고도에 따른 변화를 체험하며 느낀 감각까지도 반영하고자 했다. 실시간으로 무너지는 빙하²의 굉음과 울림이 몸을 통과했을 때나, 고지대에 자라난 식물들이 고산병으로 인해 어지럽게 보였던 기억을 회화에 담으려 한 것이다. 이 시기 김그림은 한국 바깥, 비교적 날 것의 생태계를 재현하기 위해 기억을 되짚어가며 천천히 붓을 움직이고 있었다. 여행지에서의 경험 이후 그림이 완성되기까지는 최소 몇 개월에서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작가는 이 시간 동안 흐릿하게 기억된 과거의 체험을 최대한 또렷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여러 번의 섬세한 붓질로 식물의 모양을 잡아 나가며 부드러운 털이 마치 가볍게 떠다니는 듯한 회화를 완성한 것이다. 이렇게 그려진 회화로는 〈붉은 잎〉(2021)이나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는 〈이 산은 너무 높아!〉(2022)가 있다.
 캔버스에는 아주 작은 크기의 털 난 고산 식물들이 확대되어 그려졌고, 서로 다른 높낮이로 걸려 불규칙적으로 자라난 생동감이 전달되었다. 작가가 그린 식물은 의도적인 배양이 아닌 혹독한 기후 속 적응의 결과로서 관객에게 더 낯설게 느껴졌을 테다.

〈붉은 잎〉, 2021, 캔버스에 유채, 38 x 38 cm
〈이 산은 너무 높아!〉, 2021, 캔버스에 유채, 86.4 x 78.5 cm
우리라는 은유
 김그림의 두 번째 개인전 《푸른 어둠 속 둥지 짓기》(2025)에 관한 글을 쓰면서, 작가의 몇 년 전 여행기와 과거의 회화를 언급할 필요를 느꼈다. 긴 나날을 압축해서 머리말에 옮긴 글은 올해(2025년) 3월, 전시를 시작하기에 앞서 작가가 그려왔던 회화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삼 년 만에 열린 개인전에서 작가는 이전처럼 본인이 직접 겪은 ‘이상한’ 감각을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나뭇결은 거칠어졌고 풍경은 어두워졌으며 간접적으로 경험한 동식물을 다루고 있었다. 아무렴 수년 사이에 작업 변화가 당연하더라도, 한 벽을 차지한 거대한 푸른 숲은 오밀조밀한 식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개체에서부터 구조적 장소로 확장해 내는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는데, 이미 단체전 《플랜-t 둥지 엿보기》(2024, 스페이스 미라주)에서 작가는 이번 전시의 주요 소재인 ‘둥지’에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작가는 둥지에 접근했지만, 그 둥지가 모인 불특정한 숲을 조망했고 생물이 사는 영역을 화면에 옮겼다.
  변화의 흐름에서도 생명체의 ‘적응’은 꾸준히 감지되어 왔다. 적응은 동식물이 생존을 위해 제 몸을 변형하는 것을 포함해, 환경을 피해 떠나거나 일정 부분 맞추어 살아가는 방식처럼 여러 생명체가 공유하는 행동 양식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환경에 맞추기 위한 신체의 노력도 여기에 들어가는데, 과거 작가가 고산병을 겪은 페루 안데스산맥의 평균 해발고도는 대략 5,000m로³, 새로운 식물들은 환경에 적응하려는 예민한 몸에 의해 더욱 기이하게 보였을 것이다. 작가는 고산식물의 섬모로부터 인간 피부와 동물 가죽을 떠올리며 낯선 생물을 제시함으로써 인간 중심적 시선을 전환하고자 했다. 신기한 생물로부터 인간 신체의 유사성을 느낀 것이다. 이때 관찰이 있고 은유가 그 뒤를 따랐다.
 이번 전시는 ‘바우어새(bowerbird)’라는 조류의 습성을 바탕으로 켜켜이 쌓였다. 전시와 작품을 위한 개괄을 위해, 김그림은 이 새가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다. 호주나 파퓨아뉴기니처럼 적도 근처에 서식하는 수컷의 새틴바우어새(satin bowerbird)는 교미를 목적으로 푸른색의 사물들을 모아 둥지를 일구어 왔다. 식물에 동물성 動物性을 투영한 것인지, 그들의 관찰로 피부 같은 신체 일부가 더욱 낯설게 느껴진 것인지 두 과정 중 무엇이 먼저인지 선뜻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플랜-t 둥지 엿보기》에 후속한 이번 개인전에서는 둥지를 만드는 바우어새의 활동에 인간 삶을 겹쳐 보는 과정이 더욱 짙어진다. 목적을 위해 환경을 탐색하고 물건을 수집하고, 보금자리를 만드는 일. 구체적인 일련의 생존 방식에서 김그림은 그와 가까운 집단인 우리를 떠올렸다.
 예컨대 〈홀로 서는 새, 그래도 끝까지〉(2024)와 〈Peeking into the Nest〉(2025)에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여러 새가 보인다. 이들은 어두운 풀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지만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체 생태계의 조각들을 담은 개별 회화들로부터 서로 미미하게 연결되어 있는 감각이 발생한다. 여러 바우어새의 단편들이 모이면 집단이 되듯, 회화 내에 홀로 머무르는 새에게도 회화 바깥의 푸른 숲에 사는 또 다른 동료와의 연대가 가능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전시는 은유에서 나아가 여럿이 공유하는 생을 말한다.

〈홀로 서는 새, 그래도 끝까지〉, 2024, 캔버스에 유채, 116. 8 x 91 cm
〈바우어 새의 집 짓기〉, 2024, 캔버스에 유채, 116.8 x 91 cm

친밀한 둥지 안으로
 작가에게는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존재들이 어딘가에 있음을 미약하게라도 알리려는 소망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이를 직설적으로 전달하지는 않았는데, 인간 혹은 그와 가까운 동물을 떠올릴 수 있는 식물의 형태로 은유를 거쳐 회화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여전히 인간이 순수 자연으로 여겨졌던 영역을 침범함에 따라 변화하는 생명체의 습성, 본능, 소멸하는 대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녹는 빙하의 차디찬 풍경(〈Bitter Moon〉(2024))을 통해 대자연에서 직접 경험한 기후 위기의 현장을 보여주었던 과거의 회화가 있다. 그러나 이때도 그러한 기후 위기가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도시에서 느껴지는 기계적 울림과는 다른, 광활한 지대의 붕괴가 촉발한 진동과 공포가 어둡고 단조로운 색채로 전달되었다. 이러한 위기는 현장의 체험에서 멀어져, 작업실이나 거주지 근처의 산을 거닐며 소재를 찾는 작가의 최근 작업 방식에 따라 차츰 사라져가는 듯 보였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는 일상을 빗댄 바우어새의 생활을 통해서 오히려 관객이 익숙한 삶을 대면하는 흐름으로 변화했다. 물론 식물의 섬모에서부터 인간에게 낯익은 ‘동물성’을 제안하려는 시도가 과거에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생명체의 물성에서의 닮음을 찾기보다는 습성에 주목했다.
 바우어새의 서식지를 표현한 그림 앞에서 나는 인간으로서 신기한 어떤 새의 집을 들여다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바우어새가 된 것 같았다. 전시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전면의 〈푸른 어둠 속 둥지 짓기〉(2024-2025)를 마주한 첫인상은 ‘비현실적 풍경’이라는 감상에 가까웠는데, 그래서 어떤 SF 문학의 한 장면을 그린 회화처럼 보이기도 했다. 작가의 지난 작업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자연스럽게 연계했을 수도 있지만, 그 숲에는 푸른 털이 난 나무와 식물이 심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낯선 식물은 과거 회화에서처럼 생경함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거듭해서 감상할수록 푸른 털은 현실과 동떨어진 생명체의 일부로 느껴지기보다 오히려 어두운 밤이 되기 직전, 해가 서서히 차오르는 시간대에만 보이는 친숙한 숲의 풍경처럼 보였다. 시간대를 정확히 지정할 수 없어도, 어떤 하루가 끝나고 시작되는 ‘전환’의 순간에 가까웠다. 생명체의 활동이 잠잠한 시간, 바우어새를 보기에 앞서 마주한 너른 숲은 나무 사이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 전, 여유로운 감상을 유도하는 듯했다.
 준비의 과정을 거치고 가까이에서 바라본 바우어새의 생태계에서는 그들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종임에도 친밀감이 감지된다. 친숙함이나 익숙함이라는 단어와는 조금 다른 친밀감 말이다. ‘내가 바우어새가 된 듯’했던 기억을 다시 꺼내보자면, 바우어새와의 물리적인 거리가 좁혀진 것만 같았다. 새의 생활로부터 인간의 일상을 빗댄 작가의 의도를 곱씹지 않아도, 부드러운 수풀 안을 비집어 보는 구도로부터 그들 가까이에 다가갈 수 있다. 제3의 인간 관찰자가 아닌 푸른 새로, 관객은 옹기종기 모여 사는 군집 안에 들어간다.
 이번 전시에서는 기존의 세밀한 붓질이 남긴 부드러운 섬모와 함께, 거친 나뭇결이 그대로 표현된 기법이 군데군데 보인다. 그들은 도처에 있는 나무와는 크게 다르지 않기에 낯익다. 이러한 기법은 바우어새의 전체적 생태계를 조망하기 위한 요소가 되거나 〈남들과 다른 둥지를 짓는 일〉(2025)과 같이 전면에 보이며 이곳이 판타지의 공간만은 아니라고 느끼게 한다. 그렇게 푸른 숲이라는 비현실의 공간과 일상은 서서히 연결된다.


〈푸른 어둠 속 둥지짓기〉, 2025, 캔버스에 유채, 193. 9 x 390.9 cm
〈남들과 다른 둥지를 짓는 일〉, 2025, 캔버스에 유채, 91 x 91 cm
연결된 생태계로
 생태계에는 여전히 작가의 지난 작업에서 쌓인 부드러운 식물이 자라 있지만, 포근한 털들은 전체 숲의 일부로 자리한다. 작가가 눈으로 보고 신체로 체험했던 먼 지역의 신기한 경험은 이제 더 이상 회화의 주된 소재가 되지 않는다. 그 대신 작가는 여행할 수 없는 현재에서 언제든 방문할 수 있는 작은 산, 그곳의 나뭇가지와 둥지를 그려낸다. 다만 이전의 촉각적 표현⁴과 결합해 빠르게 그려진 가까운 숲이나 간접적으로 본 특별한 생명체의 습성을 일견 환상적으로 그려낸다. 완성된 그림은 종과 종 사이의 연관을 도출해 내는 것을 넘어 회화 안의 공간으로 관객을 들이고 유화시킨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는 혹독한 지역에서의 신체적 적응 혹은 부적응이라는 현장적 경험보다는 회화로 매개된 관객의 매끄러운 적응이 감지된다. 그것은 감상의 몰입이 유도한 감화와 가까운 말이기도 하다.
 밝은 곳에 머물다가 깜깜한 방 안에 들어가면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다. 그러나 얼마 뒤에는 사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번 전시에서 맞닥뜨리는 푸른 숲은 현실 세계의 것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시간을 들여 관찰하다 보면 보이는 나무, 서로 의지하는 생명체, 그들이 생활하는 환경은 어디에나 있음 직한 것들이다. 멀리, 혹은 가까이 있는 숲의 단면을 조합해 완성된 바우어새의 둥지는 그렇게 인간의 일상을 비춘다. 나는 작가가 인간의 손길이 잘 닿지 않던 생명권(biosphere)을 지속적으로 다루어왔음을 알았고, 바우어새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로부터 푸른 물질을 모으는 그들의 둥지가 파란 폐품으로 뒤덮인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었다. 얼핏 이러한 비극은 동시대 인간의 과잉된 이기심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소재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인간의 침범 속에서 새롭게 적응하는 바우어새의 습성을 떠올릴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위기를 걷어 내고 그들의 모습을 조명했을 때, 인간과 다른 종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습성만이 남는다. 여기에서 생경한 생물체가 아닌 익숙한 모습으로부터 우리를 마주한다. 내가 있고 대상이 있는 관찰 이후, 다시 스스로를 향해 시선이 도착한다. 이렇게 되돌아온 ‘보기’는 서로 의지하는 새와 우리를 만나게 한다. 공존이라는 단어가 종종 추상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그 공존의 사례를 알면서도 방법에 대해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김그림은 회귀의 시선을 통해 어렴풋한 공존의 방식을 은은한 온기가 감도는 바우어새의 둥지로 보여준다.





¹ 수동적인 식물에 관련하여, 윤경희, 「오르페우스의 수목원」, SEMA Coral, http://semacoral.org/features/kyungheeyoun-orpheus-arboretum, 2025. 06. 15 접속 ““식물적”이라는 관형어로 수식되는 대상이 고요한, 차분한, 평화로운 행동거지를 넘어 무감각한, 무능력한, 아둔한, 경색된 상태 같은 부정적인 속성을 떠맡는다”는 대목을 참고하였다.
² 여기에서의 빙하는 작가가 2020년 1월에 여행한 아르헨티나의 모레노 빙하에 해당한다.(2025. 06. 23 작가노트 참조)
³  대한민국 서울의 평균 해발고도는 38m이다.
⁴ ‘촉각적 표현’은 작가의 논문(김그림, 『생태적 시선을 향한 여정: 촉각적이고 체화된 풍경에 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23, 서울)에서 발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