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30 - 11. 12
소비지 갤러리, 부산
작가: 누리(정누리)
주최: 소비지 갤러리
인간은 거대한 환경 속에 혼자임을 느끼는 순간 연약해진다. 아무런 연대의 가능성도 감지되지 않는 곳, 스스로 퇴행과 진보할 수 없다고 믿을 때 고립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전시에 앞서 이러한 질문을 던져 본다. 인간은 정말 완벽하게 홀로 되는 것이 가능한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연결되어 있었다. 인간이 혼자서 살 수 없다는 말은 인류의 불가능성을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딘가에 늘 지지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지면 위에 우뚝 솟은 하나의 신체는 늘 어딘가에 ‘기대어’ 있다. 언어, 땅, 마음, 생각은 대상에서 튕겨 나와 나에게로 되돌아온 다음, 신체 밖을 빠져나온다.
방 속으로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방’은 육면체의 형태이다. 각각의 방에는 창문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적어도 방이라면 문은 달려 있을 테니 외부인이 들어올 가능성은 다분하다. 하나하나의 인간들을 방으로 치환할 수 있다면 누군가의 방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혀 있을 수 있다. 어떤 방에는 여러 개의 창문이 활짝 열려 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문에는 열쇠가 꽂힌 채로 다른 이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리의 작업 세계를 하나의 방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곳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지만 내밀한 사적인 세계를 염탐하게 되는 비밀스러운 방으로 볼 수 있다. 그의 회화를 마주한 관객은 방에 들어온 손님이다. 사각형의 캔버스 안에는 침실을 연상하게 하는 환경이 그려져 있고 그 안에는 말없이 공허한 눈빛의 여성이 남겨져 있다. 관람객은 여성과의 눈맞춤을 통해 방으로 한 발짝 들어온다. 이로써 관객과 캔버스 안의 인물 사이에는 관계가 형성된다.
누리가 그리는 여성들은 모두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 보고 있는 듯한 한 명의 인간, 혹은 일제히 우측을 보는 군집의 외양은 비슷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이 응시하고 있는 관객 자신, 혹은 방향은 캔버스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그들은 화면이라는 사각의 선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시선을 따라 바깥으로의 연결을 이끈다.
당신의 광장에서
‘당신의 광장’이라는 제목은 각각 협소한 방으로서의 개인이 모여 ‘광장’을 형성하게 된 과정을 내포한다. 광장이란 군중이 지나다니는 곳, 사람들의 약속 장소, 외침과 운동이 시작되는 곳 등 집단성이 짙게 느껴지는 특정한 장소이다. 광장에서는 개별 주체들보다는 인간 집단이 발화하는 하나의 목소리가 두드러진다. 광장 속에서 개인은 쉽게 동화되고 뭉개진다. 누리 작가는 광장과 인간-인간의 관계 맺음을 비유한다. 이렇게 관계를 맺기 위해서 인간은 부딪히고 깨지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는다. 연약한 인간은 방 바깥을 나오는 순간부터 시작된 타인과의 접촉으로 무너지고, 그렇게 붕괴된 개인이 모여 광장이 형성된다. 분명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멀리서 들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아우성의 공간, 광장. 그래서 관계 맺음은 피할 수 없는 생존이면서도 나의 일부를 집단 속으로 내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위장과 소멸
나와 바깥 세계에 속한 타인, 환경과의 연결에 따른 소멸과 손상을 거쳐 각자만의 방을 넘어 광장으로 뛰어들어 간다. 이번 전시의 <버드나무>는 작가가 그간 꾸준히 그려온 한 여성이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파묻혀 있는 도상을 그린 연작이다. 여기에서 버드나무는 타인의 상징이며 접촉하는 공간이다.[1] 이는 대상과의 결합과는 구분되며, 인물은 버드나무에 동화되지 않은 채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모습을 감춘 채 있다. 누리가 그리는 회색 빛의 인물들, 남겨진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은 광장으로 편입된 이후의 상태 혹은 과정에 놓여 있다. 관객은 또 한 번 누리가 그린 인물과 눈을 맞춘다. 그 시선의 교환에 의하여 관람객은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혹은 어디를 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시선을 따라 광장의 소란함 사이로 스며 든다.
[1] 작가와의 인터뷰 참조
방 속으로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방’은 육면체의 형태이다. 각각의 방에는 창문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적어도 방이라면 문은 달려 있을 테니 외부인이 들어올 가능성은 다분하다. 하나하나의 인간들을 방으로 치환할 수 있다면 누군가의 방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혀 있을 수 있다. 어떤 방에는 여러 개의 창문이 활짝 열려 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문에는 열쇠가 꽂힌 채로 다른 이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리의 작업 세계를 하나의 방으로 생각해 본다면, 그곳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지만 내밀한 사적인 세계를 염탐하게 되는 비밀스러운 방으로 볼 수 있다. 그의 회화를 마주한 관객은 방에 들어온 손님이다. 사각형의 캔버스 안에는 침실을 연상하게 하는 환경이 그려져 있고 그 안에는 말없이 공허한 눈빛의 여성이 남겨져 있다. 관람객은 여성과의 눈맞춤을 통해 방으로 한 발짝 들어온다. 이로써 관객과 캔버스 안의 인물 사이에는 관계가 형성된다.
누리가 그리는 여성들은 모두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 보고 있는 듯한 한 명의 인간, 혹은 일제히 우측을 보는 군집의 외양은 비슷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이 응시하고 있는 관객 자신, 혹은 방향은 캔버스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그들은 화면이라는 사각의 선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시선을 따라 바깥으로의 연결을 이끈다.
당신의 광장에서
‘당신의 광장’이라는 제목은 각각 협소한 방으로서의 개인이 모여 ‘광장’을 형성하게 된 과정을 내포한다. 광장이란 군중이 지나다니는 곳, 사람들의 약속 장소, 외침과 운동이 시작되는 곳 등 집단성이 짙게 느껴지는 특정한 장소이다. 광장에서는 개별 주체들보다는 인간 집단이 발화하는 하나의 목소리가 두드러진다. 광장 속에서 개인은 쉽게 동화되고 뭉개진다. 누리 작가는 광장과 인간-인간의 관계 맺음을 비유한다. 이렇게 관계를 맺기 위해서 인간은 부딪히고 깨지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는다. 연약한 인간은 방 바깥을 나오는 순간부터 시작된 타인과의 접촉으로 무너지고, 그렇게 붕괴된 개인이 모여 광장이 형성된다. 분명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멀리서 들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아우성의 공간, 광장. 그래서 관계 맺음은 피할 수 없는 생존이면서도 나의 일부를 집단 속으로 내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위장과 소멸
나와 바깥 세계에 속한 타인, 환경과의 연결에 따른 소멸과 손상을 거쳐 각자만의 방을 넘어 광장으로 뛰어들어 간다. 이번 전시의 <버드나무>는 작가가 그간 꾸준히 그려온 한 여성이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파묻혀 있는 도상을 그린 연작이다. 여기에서 버드나무는 타인의 상징이며 접촉하는 공간이다.[1] 이는 대상과의 결합과는 구분되며, 인물은 버드나무에 동화되지 않은 채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모습을 감춘 채 있다. 누리가 그리는 회색 빛의 인물들, 남겨진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은 광장으로 편입된 이후의 상태 혹은 과정에 놓여 있다. 관객은 또 한 번 누리가 그린 인물과 눈을 맞춘다. 그 시선의 교환에 의하여 관람객은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혹은 어디를 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시선을 따라 광장의 소란함 사이로 스며 든다.
[1] 작가와의 인터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