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어떤 감각이 남은 곳으로
1.감각할 수 있지만 붙잡을 수 없는 것. 형체를 가리지만 동시에 드러내는 것. 박예림의 회화는 이 역설 위를 타고 흐른다. 화면의 획은 기억에 묻힌 바람에 근거를 두고 있다.¹ 그러나 이 획은 바람인가. 작가는 바람을 재현했는가? 바람은 한 번 스쳐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여러 대기 현상은 그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보조적인 사물, 예컨대 흔들리는 나뭇잎이나 너울 치는 파도 없이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중력, 기압과 온도는 사물이 움직이는 징후를 통해 인간에게 감지된다. 그런 의미에서 박예림이 처음 먹으로 그어 지금은 멈추어 있는 획은 이미 죽은 바람이나, 기후 현상으로 부르지 못하는 별개의 상태로 여겨진다.
대기를 그릴 수 있을까? 박예림의 그림은 언젠가 보았던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의 <폭풍(Snow Storm)>(1842)을 상기시킨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눈에 보이는 것에서부터 볼 수 없는 신화와 영혼 세계까지, 눈에 본 것과 떠오르는 심상을 적절히 배합해 회화를 그려왔다. 언젠가 잠시 본 뒤, 접어 두었던 터너의 이 그림을 오랜만에 마주했을 때는 폭풍우의 소용돌이 같이 보이는 ‘흐름’ 부분에 오래 눈이 머물렀다. 그 ‘흐름’은 엄밀히 말해 관찰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이다.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이 배를 타격할 때만 그 방향을 알아챌 뿐, 어두운 먹구름 혹은 빗방울과 달리, 대기의 움직임은 볼 수 없다. 하지만 터너가 직접 눈보라를 맞으면서 체현된 기억은 회화 위에 거친 붓질로 구현되고, 눈보라로부터 외따로 감상하는 관객은 그 생생한 감각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생동적인 현장의 재현을 두고, 표현된 폭풍우를 과장이라고 할 수 없다. 시각만이 유일한 감각은 아니기에. 붓질로 거칠게 남은 바람 역시 그가 직접 경험했던 어떤 순간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박예림의 획은 바람이면서 동시에 불의 연기나 물 자국처럼 공기 속으로 흩어 사라지는 것들을 대입해도 어색하지 않다.
2.
획은 먼저 투명한 (아크릴)판에 먹으로 칠해지고, 얇은 한지에 한 겹 찍힌다(imprint). 먹이 일차적으로 한지에 그려진 형상과 달리, 마치 판화처럼 한 번 찍힌 이미지는 감광지에 기록된 사진처럼 매끈하다. 이 찍힌 종이가 배접 되면 진한 먹으로 그렸다기보다 디지털상에서 프린트된 것처럼 더 고르고 연한 배경으로서 평평하게 펴진다. 박예림이 그린 다음 찍어 낸 이미지는 독립된 작품으로 남지 않고 다음 단계를 위한 배경이 된다. 필립 뒤부아(Philippe Dubois)는 빛이 사진에 자국을 남기는 현상을 ‘접촉’이라 불렀는데, 이러한 자국과 낙인은 대상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근거로 기능한다.² 하지만 박예림의 획은 자연적 인덱스를 따라 왔지만, 그것을 지시하지는 않은 접촉 다음, 또 다음 작업을 기다리는 과정 중 일부로 남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획의 존재를 가리키는 화면의 배경은 소멸하는 현상 따위를 동시에 떠올리는 상징으로 작동한다.
분명한 대상을 가리키지 않은 상태에서 획 위에는 고운 모래가 쌓인다. 여기에서 모래의 속성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지형이 형성되는 과정 위에 모래는 바위가 침식과 풍화를 거쳐 곱게 갈린 알갱이가 된다. 입자가 모여 해안가 등지에 퇴적되면 사구가 만들어진다. 사구는 불완전한 땅이다. 단단한 지대 위 건물과는 달리 사막의 지형은 바람에 따라 변화하기에, 모래로 만들어지는 모양은 명확한 지표로 기능하지 못한다. 박예림은 그렇게 가벼운 모래를 화면 위로 끌어와 제작한 종이 패널 위에 아크릴 바인더를 사용해 고정한다. 획의 배경 위에 쌓인 고운 모래는 그림을 위한 얕은 사구가 된다. 마치 바람에 의해 일정한 방향으로부터 이동한 모래가 지대를 만들듯, 여러 겹 같은 방법으로 판넬 위 모래가 쌓여 간다. 그렇게 쌓인 모래는 획의 낙인을 덮고 처음부터 희미했던 획은 모래가 두껍게 쌓일수록 더욱 흐려진다.
종이와 먹이라는 수성 물질은 유화되고 녹지 않는 모래 입자와 묘한 조화를 이룬다. 취약한 종이는 나무, 먹은 (나무에서 출발한) 액체, 모래는 갈아진 돌이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박예림이 채택하는 세 개의 주요한 재료는 ‘자연의 것’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먹의 농도를 조절하는 것을 제외하고, 그림에 별다른 색채를 들이지 않으며 이따금 사용하는 색도 빛바랜 나무껍질이나 그을음처럼 자연스럽게 퇴색된 듯 보인다. 그렇게 모래 입자가 쌓여 가며 흐릿해진 획 위에 작가는 목탄이나 먹을 덧그리면서 획을 선명하게 만든다. 그가 완성한 사구의 화면은 전시장 곳곳에 걸려 길을 만드는데, 완성된 설치는 마치 바람이 틈 사이를 파고드는 양태를 닮았다. 이는 지난 2024년 작가의 개인전 ⟪Bridging⟫(2024, 아트포랩, 안양)에서 전시장 자체에 견고히 붙어 있는 콘크리트 벽에 맞춤으로 획 작품을 걸었던 시도에서 담지할 수 있다. 전시장이라는 실내,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장소로 초대된 모래의 바람은 공간이라 인식하지 못했던 자리까지 침투한다. 획 작품이 벽면에 걸렸을 때, 그 사이에 선 관객은 마치 모래바람이 몸을 에워싼 움직임을 느낀다. 평면에 부착된 모래와 가려진 획이 환기하는 대기는 돛이 바람에 의해 천천히 펴지고 움직이듯이 관객을 자연스럽게 밀어낸다.
보이지 않는 대기 흐름을 회화로 ‘찍어낸’ 듯 전시했던 획 그림처럼, <Hoarfrost>(2025)나 <안개 밖의 말초들>(2025)도 비슷한 작업을 거쳐 완성된다. 그러나 획과 비교하여 이들은 더 우연에 의해 형성된 물이 만든 길을 반영한다. 투명판에 한지를 찍어내는 획 작업과 달리, 이 작업은 한지 위에 먹을 올리고 소금을 뿌린 다음 반응하는 현상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 과정을 거치며 공간의 구조를 연결하고 대기의 길을 드러냈던 설치에 이어, 물리와 화학 작용으로 만들어지는 동세를 더욱 적극적으로 보여 주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획 작업과 마찬가지로 모래바람 사이에 갇힌 듯 보이면서도, 안개나 구름처럼 응결된 수증기처럼 보인다.
3.
박예림의 작품에 관한 이 글에서 ‘~듯 보인다’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유는, 그것이 무어라 부르기 어려운 대기 현상을 불특정하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대상을 지칭하지 않고, 그의 작품은 공기 중에서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룬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에서는 무언가를 ‘읽기’ 어렵다. 읽음에 대한 욕망은 회화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고, 그 무엇을 우리에게 익숙한 사물로 정해 두는 것이다. 하지만 박예림이 남긴 화면에서는 상징적인 코드를 읽지 않더라도 획이 안내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작업은 드로잉부터 모래를 얹고 또 선을 따라 그리는 일련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물감-액체의 중력을 활용한 우연적 기법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완성된 그림에서는 보이지 않는 힘을 추동하면서 회화의 힘을 포획하는 추상회화의 ‘새로운 감각’이 감지된다.³ 그리고 그 힘은 완전히 재현도, 비-재현도 아닌 상태로 그려진다. 작가는 그러한 방법론을 실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단순화하지 않는다. 그저 감각이라는 몸에 남은 자취를 또 다른 회화 위의 자취로 이행시킨다.
최근의 시각 환경은 명료함을 초월한 세계를 구축한다. 고화질을 넘어선, 그야말로 ‘진짜’ 같아 보이는 이미지가 자동으로 생성되는 오늘이다. 기술의 우월함이 만든 이미지들은 계속해서 미끈한 액정 안팎의 차이를 허물고 만지는 행동으로부터 떨어뜨려 놓는다. 시각은 인간의 체온처럼 따뜻하고 동물의 털처럼 부드럽게 느껴지는 그럴듯한 이미지를 촉각적 체험과 연동시킨다. 그러나 대기의 작용은 여전히 시각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기억에 머물러 있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지만 이미지로 기록할 수 없는 모순처럼. 박예림의 작업은 어떤 결론을 향하지 않는다. 감각은 늘 미완의 상태로 남으며, 획과 모래, 안개와 물 자국은 자리에 머물게 한다. 박예림 회화의 불완전함은 완결된 이미지로 남지 않는 체험이다. 그리고 보는 이는 그 흐릿한 대기 속에서 의미를 발굴하지 않고 흐름 그리고 기운 안에 체류한다.
¹ 박예림 작가 노트 참조, 2025. 08. 22
² 배니나, 「C. S. 퍼스 이론에 기초한 사진 인덱스 이론의 비판과 재고찰」, 철학연구 109, 2015, p.10
³ 이솔, 「들뢰즈의 회화론: 추상에서 형상(Figure)으로」, 현대유럽철학연구 no.78, 2025, pp.125-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