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재 《틈 밖의 앞의 겉》  전시 서문




2025. 06.  12  - 07. 05
다이브 서울,  서울

작가: 조성재
포스터 디자인: 김보건
전경 촬영: 최철림
주관∙주최: 다이브 서울




너프된 캔버스, 버프된 회화


 흰 벽에 색색의 막대들이 진열되어 있다. 첫 문장에서 ‘전시’가 아닌, ‘진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가 있다. 관객을 고객으로 상정해버리는 이 단어는 첫 문장을 쓰기 위해 작가의 의도를 곱씹던 중 출몰했다. 상점에서 매대에 상품이 잘 보이도록 놓는 행위인 ‘진열’은 무언가를 사고 파는 장(場)을 상상하게 한다.
미술 시장과 동시대 예술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고, 그 둘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듯 침범하지 않는다. 두 영역을 자유로이 오가는 작가는 극히 일부이다. 그들은 제도에 의해 기꺼이 호명되어 양 측을 오가지만 이 때 작가의 태도마저 상품 가치로 환원되기도 한다.
 ⟪틈 밖의 앞의 겉⟫ 준비를 위해 처음 작가를 만나, 미술 시장과 예술의 상품화에 대한 민감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종종 이율배반적이고, 굉장한 난제라고 생각해왔지만 조성재는 그런 조심스러움에 대한 태도들을 그리 무겁지 않게 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가벼운 논의로 치부하지는 않았는데, 그가 전시에 동원되는 많은 과정들에 구체적인 의문과 반발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전시와 작품에 대한 작가의 안티-테제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전시장 벽에 걸린 막대들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전시된 직육면체는 우리에게 익숙한 캔버스 틀로, 파쇄지와 풀을 섞은 종이죽으로 만들어졌다.
작가는 그동안 캔버스 표면을 덮은 그림 너머를 향해 질문을 던져왔다. 의문은 마술 트릭 혹은 무대 뒤를 향한 호기심과 비슷한 정도로, 그리 무겁지 않다. 회화는 20세기를 전후로 환영주의[1]와 멀어졌지만 여전히 ‘평면성’을 드러내기 위해 화면과 색에 의존하고 있었다. 물감이 캔버스 천에 쌓여 흰 입방체로 이동하면 관객의 시각적 판단이 시작되었다. 생산 주체, 희소성, 소비 욕망은 별 볼 일 없는 사물을 버프(buff)시켜 시장에서 유통되게 만들었다. 비슷한 원리로 회화는 비평∙해석의 대상이 되어 미술사적 흐름에 놓이고, 작가의 의도와 맥락을 드러내는 일부로 버프(buff)되어왔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명작들을 너프(nerf)시킨다면 남는 것은 캔버스 천, 나무 틀, 물감에 불과할 것이다.
 작가는 캔버스에 그림 그리는 행위보다 캔버스-지지체와 회화를 일치 시키려 했다. 종국에는 왁구, 즉 캔버스 틀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는데, 나무를 자르고 이어 붙이는 기존의 공정이 아닌 유연한 종이 죽으로 형체를 만들어가는 작업 과정을 도출하게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채로운 직육면체는 캔버스 틀에서 기인하였으나 캔버스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파쇄된 종이 죽은 캐스팅을 거쳐 오랜 시간의 건조를 거쳐야 하는데, 건조가 완료된다고 하더라도 천을 단단하게 붙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일정한 규격으로 만들어진 틀들은 잘 알려진 예술 작품들로부터 발췌된 색으로 칠해졌다.
 완성된 작품들은 관습에 대한 삭제 혹은 전복의 도구를 드러내는 데 도움을 준다. 예컨대 2024년의 단체전 ⟪쥐뿔 Fiddle-Faddle⟫(2024, 래빗앤타이거, 서울)에서 조성재는 15일이라는 시간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활용해 테트리스 게임을 구현했다. 이는 관객과 작품의 정해진 위계와 규칙에 미세한 균열을 내기 위해 기획된 프로젝트였다. 캔버스는 벽을 타고 쌓이다가 마지막 날 ‘킬 스크린(kill screen)’에 도달해 사라졌다.
이러한 전시에서 보여 준 작업들은 평면 안에서, 혹은 겉에서 서술되는 이야기가 제거된 조형적 실험처럼 보였다. 아직은 사각형의 틀 모양을 고수한 채, 새로운 방식으로 캔버스를 제작하는 의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다 2025년 가장 최근에 참여한 아트페어에서는 완결된 사각형 캔버스가 아닌 개별 막대에 가격을 매겨, 최소 단위로 값을 책정했다. 이 또한 전시 공간에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의 연장선으로, 관객이 작품의 조각들을 구매한 다음 새롭게 조합하기를 의도한 것이다.
 조성재의 작품 속 숨겨진 의도에는 미술에 대한 위트, 시장이 촉발한 욕망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러한 작가의 양가적인 태도는 세련되어 보이는 색색의 막대들에 의해 가려진다. 규칙적으로 설치된 캔버스는 제도를 향한 비판적 의식과는 거리를 둔 채 중립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작업이 피스(piece)로 더 많이 판매∙유통되고, 관객과의 거리가 멀어질 수록 작가의 의도는 점점 더 수수께끼로 남는다.
 여기, 다이브 서울이라는 전시 공간에 들어온 순간 육면체의 사물들은 캔버스의 존재를 뚜렷하게 끌어 올리는 작품으로 기능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 ⟪틈 밖의 앞의 겉⟫이 일종의 쇼룸(Show Room)처럼 보이기를 의도했다. 캔버스 사물과 원본 작품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막대들은 벽면을 타고 흐르는 파이프처럼 규칙적으로 걸려 있다. 첫인상으로는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작가의 의도는 그렇게 중립적인 ‘척’을 하고 있다. 그저 캔버스를 새롭게 재현한 듯한 결과물에는 마술 트릭처럼, 환상 뒤에 감춰진 의문들을 조용히 포함하고 있다.  




[1] 이 때의 환영주의는 외부 세계, 즉 현실을 모방하고 평면 위에 재현하여 3차원 공간을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한 미술사적 계보를 의미한다. 그러나 현대성을 추구하며 등장한 20세기 초반(1930년대)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 그리고 ‘모더니즘’ 이론에 의해 회화는 3차원 대상의 재현에서 벗어나, 전통 회화로부터 결별하며 예술계의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