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현 《깃털과 별과 시간》 전시 서문




2025. 10. 11  - 10. 26
예술공간 의식주,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80 2층

작가: 진지현
기획 및 글: 강다원
포스터 디자인: 박소호
주관 및 주최: 예술공간 의식주
후원: 서울문화재단 창작예술공간 지원사업, 스트로아트파트너십


하늘 천(天)은 사람(大)의 머리 위에 있는 공간을 나타내기 위해 쓰였다. 사람과 하늘, 글자 사이에는 작은 공간이 있다. 획 사이는 땅과 하늘의 경계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를 때 벌어진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사이의 공간에는 ‘공백’보다 ‘여백’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 공백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면, 여백은 무언가 채워지고 남은 빈 곳을 뜻하기 때문이다. 여백을 강조했던 문인화를 떠올려보자. 종이 위를 지나간 한 번의 획을 중심으로 ‘그린 것’과 ‘그리지 않는 것’이 발생한다. 공간의 비워둠은 형상을 드러내 그리지 않은 부분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 회화에서 전통적인 여백은 ‘화면상 표현된 형체 외 비워둔 공간 또는 형체 이외의 요소로 간주하는 부분으로서의 공간’¹으로, 대상과 동등하거나 혹은 더 정신이 깃든 영역을 뜻한다.
 《깃털과 별과 시간》에서는 그동안 진지현이 탐구해 온 회화 기법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그림에는 여백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해와 구름, 발광하는 빛, 새와 다른 존재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배경은 메워진다. 빛과 그림자를 그려야 할 때, 일반적으로 빛은 밝게 그림자는 어둡게 묘사한다면 진지현은 그 반대로 빛을 채색한 셈이다. 또 하나, 이 그림들의 풍경은 일상의 존재를 담고 있지만 역접된 세상처럼 느껴진다. 그림의 장면을 현실 위에 포개어, 투명하기까지 한 청명한 하늘 위를 활주하는 새를 구체적인 동세를 상상한다. 방금의 발상이 아날로그 사진에서의 포지티브 필름(positive film)이라면, 진지현의 회화는 네거티브 필름(negetive film)과 같다.
 작가는 지난날 작은 생명체들을 섬세한 도구, 종이 위에 동양화 안료나 연필, 색연필 등을 사용하여 여린 색채로 표현해 왔다. 길가의 풀꽃과 이파리, 강아지나 고양이와 같은 인간과 가까운 생물들은 작가의 섬세한 그리기로 재현되어 친숙한 온기를 남겼다. 이후 작가는 나무에 인두를 태워 음각 작업을 진행하거나, 건조한 붓에 먹을 묻혀 외곽선을 그리면서 재료 연구를 발전시켜 왔다. 음각 기법과 물기 적은 안료의 결합은 대상을 여백으로 두는 지금의 회화로 이어진다.
 먼저 작가는 스케치한 종이 위에 갈필로 종이를 일정한 방향으로 스쳐 하늘을 채운다. 갈필이 오갈수록 형상은 더욱 선명해진다. 형체를 만들기 위해 어두움을 반복적으로 터치하는 것이다. 안료는 선명하고 단단한 발색으로 장지 위에 내려앉는다. 작가는 하늘, 혹은 대상의 배경을 그릴 때 밝음과 어둠, 맑고 탁함 사이의 스펙트럼이 느껴지는 색을 함께 사용한다. 멀리서 보면 연필이나 색연필 같은 건식 재료로 그린 듯한 회화들은 물기가 적은 갈필로 그려져 배경과 대상 사이의 구분을 더욱 뚜렷하게 만든다.
 전시 공간의 작품들에서는 하늘을 비상하는 새가 어두운 바다속을 유영하는 생물체처럼, 혹은 하늘보다 더 높이 있는 우주 공간을 배회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수직과 수평의 갈필로 짜인 대기라는 배경은 아무것도 만질 수 없는 현실의 공기와는 달리, 장지 위에 건조한 입자로 남는다. 그리고 잡히지 않는 하늘을 촉각적으로 감지하게 한다. 마치 마른 실이 교차된 옷감처럼 작가의 손을 거쳐 교차하는 획은 평평한 대지를 메우고 있다.
진지현이 그린 건조한 회화에서는 시원한 바람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 화면에 채색된 푸른 색감과 상승하는 새, 날리는 깃털에서 비롯된 감각일 테다. 작가의 회화에 등장하는 비행하는 새는 직선으로 난 빛의 길을 따라 상승하고 있다. 지난 회화와 달리, 보다 역동적인 동세를 취하고 있는 새는 지구의 하늘을 넘어 우주를 뚫고 나아갈 기세로 보인다. 실제로 몇몇 그림들에서 새는 점점 더 해나 달 같은 행성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진지현은 자유를 만끽하는 새를 반복적으로 그리며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선 인간의 마음을 새에게 투영시키기도 한다. 그의 네거티브-세계는 동양화에서 전통적으로 남겨 두었던 여백을 채우는 일과 동시에, 일상의 생물을 현실적으로, 동시에 불가능한 자유를 빗댄 것이다.
 〈노을이 물든 구름〉(2025), 〈노을을 지나가는 새〉(2025)를 포함하여, 이번 전시에서는 가을의 공기를 떠올리게 하는 색감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여름의 쬐는 햇빛이 아닌, 청명하면서도 빛바랜 화면은 전시 기간이 통과하는 현재를 환기한다. 그렇게 10월에만 만끽할 수 있는 지금은 화면 위에 겹쳐진다. 〈너머의 곳 1〉(2025), 〈너머의 곳 2〉(2025)은 공간 중앙을 가로 지르며,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 가는 환절기처럼 걸려 있다. 두 회화를 기준으로 좌우에 여름과 가을의 하늘이 펼쳐지고, 전시가 진행되는 10월의 오늘을 회화 위로 겹쳐낸다.
 제목에서 깃털과 별은 진지현의 회화에 등장하는 도상이다. 깃털은 새가 남긴 흔적, 별은 그것을 쫓아가는 새의 목적지를 은유한다. 흔적을 남기며 별을 쫓는 새의 지난한 여정은, 시간이라는 단어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우리 눈에 익숙한 존재들을 따뜻하게 포착했던 진지현은, 위로와 희망이라는 정서를 간직한 채, 갈필로 반복적인 행위를 거듭한다. 한 자리에서 끊임없이 획을 가르는 작가의 손짓은 하늘과 사람 사이의 여백을 지속적으로 메우고, 반전된 필름처럼 가까운 세계를 투사시킨다.




¹ 김인환, 『동양예술이론』, 안그라픽스, 서울, 2003, p.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