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2. 19 - 03. 02
영공간, 서울
작가: 최수경
포스터 디자인: 최수경
주관∙주최: 영공간
천천히, 기나긴 하루
창문을 열고 바라본 하늘의 색으로 오늘의 날씨를 확인하고, 햇빛의 정도로 청명함을 가늠한다. 어느 날은 적당히 흐리고, 어느 날은 몹시 맑다. 매일 마주하는 똑같은 창문 너머 도심의 풍경에는 각종 건물과 그보다 먼 동네의 산이 있고 그 위에는 가벼운 구름이 떠 있다. 눈을 감아도 주변의 익숙한 장면들은 쉽게 그려진다. 그러나 이렇게 낯익은 도시를 떠올리다 보면 실내외를 구분하는 창틀도, 그 사이를 막는 촘촘한 방충망이라는 막(layer)도, 유리창에 반투명하게 새겨진 물때는 시야 바깥으로 사라진다. 매일 마주하는 하나의 장면은 기억에 자리하지만 풍경과 관찰자 사이의 창, 방충망, 물때는 관찰과 기억의 대상에서 비켜 나간다.
종종 매일 걷는 아스팔트와 보도블럭이나 아침이면 기다리는 건널목은 물론이고 계절에 따라 바뀌는 가로수까지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걷기에 자연스럽게 체현된 환경은 그대로일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익숙함은 무심함으로 대체되고 나와 그 바깥을 이루는 존재들은 매일의 미세한 변화를 따라오지 못한 채 기억 속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최수경은 우리가 같은 풍경이라고 불러 온 것, 동일한 자리에서 본 나날들을 천천히 장지 위에 쌓아 그린다.
최수경은 그에게 익숙한 작업실을 포함한 실내 바깥의 풍경을 그린다. 작가는 그가 거주하는 마을의 수변, 교각, 거리를 정직하게 그림에 담아왔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정직하게 담으려는 의지는 채색을 거쳐 빛이나 형상이 물 위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찰나를 오랜 기간 기록하는 표현으로 이어졌다. 이번 전시는 그간 작가가 현실의 장면들을 낱낱이 그려내고자 했던 시도와 이어져 있다. 찰나로 압축된 상황의 시공간을 곱씹어 그것을 종이에 천천히 쌓아 올리며 처음 바라 보았던 순간, 카메라를 들어 포착했던 때. 다시 종이 위에 복기하는 현장을 펼쳐 기록하는 것이다.
건물 바깥의 풍경과 최수경 사이에 끼워진 창은 이렇게 나뉜 시간을 증명하는 도구다. 전시 공간에 들어서자 보이는 〈Yellow Sunset〉(2024)에 표현된, 반쯤 가려진 원형의 햇빛으로 투명한 유리창의 물 자국은 어디선가 본 듯한 건물의 군집을 떠올릴 관객에게, 꽤 오랜 시간 창에 남긴 지난 날의 흔적을 떠올리게 한다. 비슷한 구도에서 그려진 〈Lemon Sunset〉(2024) 역시 캔버스 가장자리에 미세하게 보이는 창틀, 방충망과 물 자국들이 선명하게 나타나지만 물 때가 여러 겹 쌓여 있는 부분에서는 햇빛이 분절되어 보인다. 그러나 비교적 매끈하게 보이는 나머지에서도 방충망 요철의 표현은 강한 빛의 파장을 쪼갠다. 손에 쥘 수 없는 빛 덩어리가 자그마한 격자와 불규칙한 자국으로 인해 조각나면서 빛의 물질성은 더욱 드러난다.
같은 위치에서, 그러나 다른 시간대를 그린 그림들은 실제 최수경 작업실의 창문 크기와 비슷하다. 그림을 제하면 눈에 거슬리는 사물이 없는 전시 공간 벽면을 따라 회화들은 마치 복제된 창문처럼 나열된다. 발걸음을 그림과 나란히 옮기며 작가가 바라보았을 풍경은 그림의 관찰자로 전이되고, 실내 형광등과 그 아래 작가의 형체가 오른쪽보다는 맑은 유리에 반사된 상은 서로 다른 회화로 동등하게 나뉘어진 풍경이 동일한 하루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어느 날은 조금 늦은 시간에 촬영하여 조금 선명하게 실내 형상이 드러나다가도, 다른 날의 강렬한 햇빛은 그 모습을 조금 지워내기 때문이다. 그림에 몸을 밀착하다가 일순간 멀리 떨어지면 창 앞에 선 작가의 몸과 주변 형광등이 유독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는데, 이 순간 그림은 하나의 유리창이 되기도, 전시 공간은 최수경이 위치한 작은 작업실로 느껴지기도 한다.
방충망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후, 작가는 처음에는 조밀하게 그려낸 풍경 위에 빼곡한 방충망을 덧입혀 그리다, 〈여름 조각〉(2025)을 그릴 무렵, 네모난 격자 안에 풍경을 채워 넣는 방식을 고안했다. 촘촘한 망에 가까워지자 그 뒤의 풍경은 평평한 면이 되고, 방충망은 장면을 분해하는 거름망이 된다. 픽셀처럼 나뉜 창 너머의 풍경을 사각 캔버스에 퍼즐처럼 맞추어 나가며 최수경은 어느 하루를 완성한다.
이번 개인전에서 작가는 ‘시각적 교란’을 다룬다. 그림의 소재이자, 교란을 유발하는 요인들은 투명·희미한(pale) 배경(setting)이라는 제목에 나타난다. 시각적 교란은 선명했던 풍경들이 창, 방충망, 물 때라는 한 겹의 레이어로 불투명하게 보이는 현상과 함께, 어떤 장면을 바라 보았을 때 의도적으로 삭제되는 시공간, 이를 테면 유리창에 비치는 본인과 실내 환경을 인지하지 못하고 외부에 넋을 놓는 사건까지 포함된다. 교란이라는 단어에서는 특정한 대상이 야기한 어지러움이 튀어나오지만, 시각적 교란으로 인한 ‘착각’은 분명히 목격했지만 기억되지 못한 존재와 관련이 있다. 최수경은 정직하고 여과없는 방법으로 그의 삶을 담는다. 작가에게 별다른 과장이나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것은, 관찰 다음 기억으로 머무르는 과정에서 개입하는 교란과 결별하기 위한 노력에 해당한다.
방충망 너머의 풍경, 혹은 그 안의 풍경. 창이라는 한 개의 층이 복잡한 세계를 잘게 쪼개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 뒤로, 차츰 그리는 방식은 변화한다. 다시 오지 않을 나날들의 다름을, 그 순간들을 그리는 방식은 비슷하지만 작가에게 가까이 다가온 사물은 평범한 오늘을 오랫동안 붙잡아 둔다. 그리고 천천히 오래, 순간의 목격이 놓친 어느 날의 풍경을 끈질기게 잡아 두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