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의 삼각형》 전시 서문



2024. 08. 28 - 09. 08
예술공간 의식주,  서울

참여작가: 보트, 럭씨, 이소
기획: 박소호
글: 강다원
주관∙주최: 예술공간 의식주
후원: 서울문화재단 창작예술공간 지원사업



발자국
 몸이 지나간 자리는 지면 위에 상처로 남는다. 아스팔트에 오목하게 패인 동물의 발자국, 물기를 머금어 곧 사라질 땅바닥의 신발 형상, 분주한 움직임이 엿보이는 자국은 지나간 과거다. 그들은 평평한 대지 위의 상흔이다. 미지의 땅을 딛고 선 후의 흔적은 인간의 눈으로 바라본 장면의 첫 순간을 입증해 왔다. 그러나 그런 발견은 땅에 입힐 또 다른 상처의 시작을 암시하는 지난한 미래의 시작이었다.
 전시 ⟪콜럼버스의 삼각형⟫에서 발자국은 또렷하게 남아 있으나 새로운 땅의 정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닥 위 일정한 흐름을 따라, 자국은 관찰자를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한다. 어떤 존재의 동선을 추적하고 싶은 마음으로 발을 옮기다 보면 각각의 존재들이 바라본 장면에 도달하고 관찰자의 눈에는 발자국의 주인이 바라 본 무언가가 맺힌다.

눈이 닿은 지금의 자리
 현실의 힘이 우리의 몸을 자꾸 아래로 끌어 내리더라도 럭씨가 그리는 캐릭터는 새로운 장소로 향할 것이다. 그의 그림 속 캐릭터는 선글라스로 착용한 채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럭씨는 건식 재료, 아크릴과 스프레이 등 여러 재료를 사용하여 건조한 벽화로 보이는 그림을 그려왔다. 우리 주변 길거리의 벽화들은 여러 겹 덮이고 퇴색되어 처음의 색을 잃어 가고 행인의 시선을 끌지도, 경관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도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럭씨의 캐릭터들은 어딘가로 향하는 동작을 취하고 있으므로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갈 것 같아 보인다.
 럭씨가 그린 캐릭터의 눈이 가려져 있었다면 보트가 만든 캐릭터의 눈에서는 감정이 뚜렷하게 떠오른다.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고양이 ‘캐시’는 보트의 여러 자아 중 하나로, 떨리는 몸과 눈은 바깥에서 기인한 두려움의 예민한 표출이다. 공간의 벽과 바닥에 남은 고양이 발자국은 캐시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보트의 그림 속에서 눈은 캐릭터의 감정이 드러난 결과이기도 하지만 외부의 모든 것을 관통시켜 인물 안에 스며들게 하는 필터로 이해할 수 있다. 이로써 눈은 내외부의 작은 자극에도 쉽게 변화할 수 있는 투명한 막이 된다.
 걸음을 재촉해도 비슷한 풍경이 우리 곁을 스친다. 각기 다른 이름의 위성 도시들의 아파트 단지, 상가, 놀이터들이 반복해서 세워질수록 지금 시대의 우리에게 가장 평화로운 장소라는 믿음은 견고해진다. 이소는 도시의 공통된 조경을, 같은 미소를 띤 팬지에 빗대어 반복적으로 제작한다. 작가는 주변의 어떤 동네를 대입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도식을 가상의 지도 안에 투입한다. 그 위에 팬지는 마치 영역의 표기처럼 자리한다. 단순한 획으로 표현된 팬지의 눈은 행복의 표출이라기보다는 웃기 위한 움직임으로 보이기에, 더 활짝 미소 짓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 은은한 미소, 오직 그 정도만을 바랐을 수 있다. 이소의 작품은 마치 대도시의 교차로에서 스쳐 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인물과 그들이 원하는 안전한 웃음을 떠올리게 한다.

콜럼버스의 삼각형
 누군가의 발자국이 발견된 순간부터 시간은 흐른다. 개척자에 의해 발굴된 장소 안으로 다음 사람들이 들어오고 그들이 관찰하는 시공은 현재에 다다른다. 전시 제목 ⟪콜럼버스의 삼각형⟫에서 ‘삼각형’은 여러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처음의 관찰자 콜럼버스에서 파생한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일 수도, 그 위에 선 인물의 관계도일 수도 있다. 삼각형의 한 점에는 평평한 땅 위에 곧게 선 인물, 캐릭터의 몸 안팎을 오가는 유연한 자아, 위에서 아래로의 시선을 지닌 이들이 서 있다. 세 작가들의 공통점인 ‘눈’은 시선의 방향 그리고 보는 행위로 연결된다. 수평과 수직의 시점에서 본 세계(럭시, 이소), 몸 안팎을 둘러싼 환경을 반영한 눈(보트), 작가들은 각각의 점 위에 공고히 서서 서로를 연결한다. 마침내 만들어진 삼각형은 과거의 발자국과 오늘의 관찰을 안은 채 또다른 낯선 이의 유입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