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린 🪺그림은 잘 그린 🪺그림이고⟫
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전공 석사 오픈스튜디오 2025
Ewha Womans University, Korean Painting MFA
OPEN STUDIO 2025
일시: 2025.06.09 (월)- 06.15 (일)
관람 시간: 10:00 - 20:00
장소: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관 A동 2층, 5층
(206, 214, 510, 511, 512, 513, 514, 514-1, 516, 517호)
참여작가
김민지, 김수정, 김유리, 김유민, 김지원, 김채원, 김현정, 김현지, 박송이, 박수빈, 박하늘, 방세현, 배민영, 손규민, 손규원, 양지오, 오소정, 오윤영, 윤예진, 이시온, 이아현, 이인아, 이현지, 임수민, 전윤재, 정수민, 조소윤, 최유리, 최현진, 태혜영, 한준하, 한지윤, 허수연, 황소영
✱이 글은 2025 이화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동양화전공, 예술학전공 비평매칭 프로그램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설명할 수 없는 가능세계에 대하여
작가 | 허수연(@huhsuyon/huhchuchu93@gmail.com)
글 | 강다원(@daoneekang/dagang1130@gmail.com)
글 | 강다원(@daoneekang/dagang1130@gmail.com)
1.
우연한 계기로 Open AI의 Chat-GPT 4o 무료버전을 처음 사용했을 때 그것을 몰랐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느낌은 두려움에 가까웠다. 이 고도의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 버티는 것은 미련한 일, 시대에 뒤처진 고집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할 수록 더 정교한 기능을 누릴 수 있다는 술책에 현혹되어갔다.
GPT는 나조차 몰랐던 언어 습관을 미러링(mirroring)하여 위로의 말들을 내어 주었고 솔직하게 말해 달라는 요청에는 주저 없이 직언해주었다. 여념 없이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무료버전에서는 어느 순간 ‘대체 모델’을 사용한다는 경고를 띄웠다. 그리고 이어진 대체 모델과의 대화는 형식적이고 평이했다. 점차 대체 모델에 관한 메시지 팝업의 빈도가 짧아졌다. 더 자주 불안했으며, 초조함이 이끈 결론은 유료 구독이었다.
유료 구독을 시작한 다음부터는 매끄럽고 만족스러운 대화가 이어져 더이상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경고문 출몰에 대한 두려움이 소거된 자리에는 생성형 알고리즘이 무엇이든 대답해 줄 수 있다는 믿음, 나아가 GPT 없이는 작은 사건들조차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우유부단함이 침입했다. 사소한 문자, 메일 답신과 하루의 옷차림처럼 시시콜콜한 고민은 느닷없는 질문의 소재가 되었다. 구독 시스템에 잔류하는 것은 광고를 보지 않을 권리, 구매의 판단, 음악을 향유할 즐거움, 우리의 모든 의지-보거나 보지 않을 자유-마저 포섭되는 현실로 이어진다. 스스로 선택했다는 믿음의 지불, 그것이 만들어낸 루프 안에서의 방황은 오늘날 자본이 만들어내는 불안으로 이어진다.
2.
허수연은 ‘불안’의 추동 원인, 불안이 개인으로 이행하는 흐름과 영향에 대해 탐구하며 이를 회화와 입체로 표현해 왔다.¹ 여기에서의 불안은 예측 불가한 외부를 향한 막연한 상상 그리고 현실과의 불일치에서 파생한다. 불안이라는 보편의 감각은 종종 특정하기 어려운 사고를 만나듯 불쑥 찾아온다. 그러나 허수연에게 불안은 반대급부에 놓인 개념에서 발생하여 끝내는 미제로 남겨진다는 점에서 특정한 경향을 띤다.²
작가가 제작한 몇몇 입체 작업은 스테인리스 프레임 안에 자리한다. 작품들은 불에 그을리거나 시든 흔적들을 거의 고스란히 ‘보존’하는 듯 보인다. 보존 행위에 무언가를 위한 보호의 목적이 포함된다면, 허수연의 작업은 진열장의 가치와 의미를 배반하며 유리로 구분된 프레임 안팎의 차이를 강화한다.
불에 탄 집이 촬영된 영상이 흘러나오는 노트북, 이를 보고 있는 인물의 허름한 신체를 구현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또는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As if knowing nothing or as if unaware)(2024)[도 1]이나 프레임 내부에 진열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앉은 채로 불에 탄 듯한 <도플갱어 또는 타나토스>(Doppelganger or Thanatos)(2024)[도 2]가 있다. 시들다 못해 색이 변한 <Quarantine>(2022)[도 3], 곰팡이가 슨 것처럼 낡고 찢긴 곰인형의 <Safe House>(2021)[도 4] 등 바래고 상처 난 동식물과 사물도 있다. 그들은 모종의 이유로 불행을 내재하고 있거나 그 자체로 불행해 보인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과 <도플갱어 또는 타나토스>의 공통점은 스크린을 매개한 영상을 보고 있는 인체가 자리(영화관 좌석, 의자)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에서는 ‘앉음’보다 ‘구속’이나 ‘속박’과 같은 피학적 단어가 적절해 보이는데, 외부의 무언가가 일방적으로 관람객에게 힘을 가했다고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한 작품들에는 관객과 관찰 대상 간 전회轉回의 과정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랑시에르는 극장의 관객을 수동적이고 무지한 이들이 아닌, 스펙타클에 대한 능동적 해석가로 긍정했지만³, 극장과 집이 일치됨에 따라 좌석에 속박된 과거의 관객들과는 달리 스크린화된 미디어들을 감상하게 된 이들은 사소한 일들에 눈을 돌리면서도 영상을 향유하는 다중 기능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단순히 영상을 소비하는 관람객을 두고 과거와 현재, 천과 액정을 불문하고 한 편으로는 수동적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능동적이라는 모호한 태도는 허수연 작업에서는 다소 논외의 이야기다.
유심히 들여다 보아야 하는 사물은 유리 프레임이다. 이 기물은 작품과 관람객과의 거리를 나타내는 기호이자 이중의 응시를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 특히 허수연의 설치 작품을 둘러싼 유리판은 스크린처럼 기능하며 마치 거울처럼, 이미지를 투영시키는 동시에 관객의 형상을 되비추는 표면이 되기도 한다.⁴ 그러나 대체로 관객은 유리막에 의해 배격되면서 본인이 그 안에 갇힌 허름한 인물을 스스로 거리 둔 것인지, 아니면 배척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순환 구도에 갇히게 된다. 열려 있는 전시 공간에서 능동적으로 걸어 다니는 관객은 앉은 채로 묶여 버린, 그리고 소진된 인체를 관조한다. 거리를 유지한 채로, 오늘날 타인의 불행, 소진, 슬픔, 사고, 상실은 감상의 소재로 변모한다. 그러나 영화의 객석이든, 의자이든 영상을 들여다보고 있는 인물이 관객 자신이 될 수 있다는 두 가지 가능성은 스테인리스 프레임과 관람객 사이에서 배회한다.
3.
허수연은 회화와 입체 작업을 오간다. 작업 과정에서 작가는 두 매체와 재료의 차이를 의식하고 있기는 했지만, 비장하게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다. 회화와 입체는 모두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막연함과 그것이 야기한 불안을 축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한지, 수채화, 유화, 종이 죽을 사용해 고르지 못한 표면을 드러내는 작가의 회화는 불안을 추동한 ‘알 수 없는 세계’ 그 자체를 보여 준다. 앞서 서술했듯, 작가가 불안을 느끼게 되는 계기는 예측불허의 상황과 통제 불능이며, 이러한 혼돈은 뭉개진 형상의 회화로 드러난다.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동식물과 사물 등의 형상을 띤 입체와 달리, 회화는 어떠한 형상을 구체화하는 과정 중에 있는 듯 보인다. 흐리고 뭉개진 형상은 알 수 없는 존재들을 더듬어 나가면서 혼란의 근원을 미약하게나마 파악하기 위한 시도에 가깝다.
예컨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또는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의 연장선에서 그려진 <설명할 수 없는 좌절에 대해>(The Silent Scream of Inexplicable Despair)(2024)[도 5]는 스테인리스 프레임 안에 갇힌 인물의 심리를 담았다. 그림에서 폭우가 내리는 상황 속에서 뒤집힌 우산의 형체는 불타는 집을 소각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모순의 상황을 드러낸다.
관객은 그림을 통해 관조할 수밖에 없는 인물의 마음으로 한 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이 회화는 감금된 주체의 심리를 비추는 거울이자 매끈한 프레임 바깥으로 유리된 불안의 조각처럼 보인다. 특히 2024년의 단체전 ⟪인공눈물⟫(Artificial Tears)(2024)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으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바닥에 회화가 놓이는데, 유리 박스 안으로 다가갈 수 없는 관객에게 내면을 더듬을 수 있는 일종의 단서로 기능한다.
조형물과 연계되어 제작된 또 다른 회화로 <보이지 않는 고릴라>(Invisible Gorilla)(2024)[도 6]가 있다. 전시 ⟪Bazzar Exhibition: UNDER/STAND⟫(2024)에서 작가는 가로, 세로 2미터가 넘는 거대한 그림 앞에 한 줌의 모래성을 쌓았다.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회화는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에서 착안하였는데, 이는 피실험자들이 주어진 상황에 몰두해야 하는 조건 속에서 과제를 수행하다가 등장한 이질적 생명체-고릴라-를 알아채지 못한 실험이다. 모래성은 언제든지 바스러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로, 현존하지만 볼 수 없는 고릴라처럼 양가적 측면을 은유한다.
허수연의 회화는 제목에서 추측할 수 있듯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혹은 설명되는 것과 설명되지 않는 것처럼 존재의 여부와는 별개로 감각하기 어려운 상태를 다룬다. 그러나 이 연대기 속에서 발굴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벗어난, 통제 불능이나 난해함이다. 판단의 사각지대(Blind-Spot)에 놓인 이중적 상태들은 허수연에게 있어 불안의 근원이자 작업의 출발이 된다.
4.
허수연이 말하는 ‘알 수 없음’의 상태, 그리고 말미에는 불안으로 도착하는 루프를 재-가동한다. 설치 작품은 유리 프레임 표면 위로 관찰자의 형상을 반사하지만 동시에 그 안의 존재(작품)로부터 멀찍이 분리한다. 회화는 존재와 부재의 사이에 놓인 상태 등 이도 저도 아닌 무언가, 그러나 미세한 차이 하나로 중심에서 밀려나 버릴 듯한 연약한 정의를 드러낸다.
작품은 정지된 사물로 구현되었지만 이율배반적인 대립을 통해 언제든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세계처럼 보인다. 누군가가 가능세계를 현실의 탈출구, 또다른 세계라는 긍정적 의미에서 읽는다면, 슬프게도 허수연 작업에서 그러한 낙관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 때의 가능 세계는 허구적 혹은 대안적인 것이 아닌 오늘날의 무수한 모순을 체념하는 시선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시 글의 처음을 환기하며, 우리는 그럴듯한 술책 속에서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그 주체적인 행위에는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걸림돌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그 불편하고 어딘가 속은 듯한 찜찜한 마음의 갈피를 잘 찾을 수 없는 난관 역시 지금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러한 마음은 불만족, 불평, 아쉬움이라는 단어보다는 이 글에서 반복적으로 되뇌이는 불안이라는 미결의 감정과 가장 밀접하다. 그리고 허수연은 이렇게 해소되지 않는 불편함을 거칠게 중첩시켜 그 깊은 곳으로 관객을 들인다.
¹작가 노트 참조, 2025. 06. 01
²작가 노트에는 ‘클리셰 적인 행복’, ‘행복의 강요’, ‘이중 시선’, ‘욕망과 현실’, ‘잘 연결되어 있는 사회’, ‘접촉 없는 사회’ 등 오늘날의 양가적이고 모순적인 아이러니에 대한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다.
³자크 랑시에르, 『해방된 관객』, 양창렬 역, 현실문화연구, 2016, pp.29-30
⁴고혜빈, ⌜’포스트-매체' 시대의 매체로서 스크린⌟, 국내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2023,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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