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모연 《Styx》 전시 서문




2026.06.20. - 07.05.
예술공간 의식주,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80 2층

작가: 김모연
주관 및 주최: 예술공간 의식주
서문: 강다원
후원: 202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주체




사전과 사후 여백
 김모연의 그림을 본 감상자들은 이렇게 느낄 것이다.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들, 자연이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풍경들, 움직이고 있지만 굳어 있는 신체들, 발생할 수 있지만 허락되지 않은 일들. 도끼로 목을 내려치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는 장면들은 무모해 보인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폭력적인 장면이 아니라 작가가 구축한 사후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매끈한 스크린에서 보는 그의 작업에 맺힌 점들은 글리치 노이즈(Glitch Noise)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늘날은 거짓된 이미지마저도 완전무결한 고화질로 만드는 세상이지만, 점묘는 상상으로 만들어진 세계라는 사실을 알려주듯이 즉물적인 필터를 한 겹 씌운다. 낯선 자와의 만남과 대화, 영혼의 소실, 분실된 영혼이 도착하는 장소가 담긴 김모연의 그림이 시사하는 미지는 우리와 가깝고도 먼 미래이면서 동시에 과거이기도 하다.
 김모연이 그리는 사후세계로의 진입은 죽음 이후에 발생하는 사건이다. 이는 하나의 역설을 만든다. 죽음이 우리 생애의 마지막 경험이라면 사후세계는 생후 첫 경험이다. 처음 일어나는 사건은 멀고도 가까운 미래, 혹은 과거라는 모순을 가능케 한다.
역사적으로 예술가들은 종교의 초월적 존재와 미지의 풍경을 그리기 위해 가장 익숙한 소재를 선택해왔다. 창조주, 예수, 천사, 그리고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인간의 얼굴을 갖추었다. 김모연 역시 가장 가까운 몸과 저장된 눈의 기억을 담아, 미지의 텍스트가 서술하는 세상을 그려 낸다. 기독교의 성경, 그리스·로마 신화, 불경전, 이슬람의 코란(Quran), 힌두교의 슈루티(Sruti), 스므라티(Smriti)처럼 다국어로 번역되어 유통된 교리들을 여러 번 들어 보았을 것이다. 김모연은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이렇듯 다수의 신자들이 믿는 교리를 참고하지만, 부두교나 사이비 종교처럼 원시적이고 이단으로 불리는 종교들도 불러 낸다. 한편,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세 개의 붉은 말은 켈트 신화에서 착안하였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인간은 마오리 신화로부터 출발했다. 〈남쪽을 지키는 개〉는 이누이트 신화를 참고한 작업이다. 이렇듯 작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종교나 신화를 포함해 아직 시각적으로 재현되지 않은 낯선 이야기를 다룬다. 서로 다른 문화권의 독립된 이야기들은 작가의 기법을 거쳐 마치 통합된 세계로 모여든다.


점 사이 공백
 작가는 죽음 이후 시간이 존재하는지에 관한 의문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그 동기에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라는 사적인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작가는 수많은 신화와 교리를 탐독하면서, 그들을 회화로 펼쳐 내려는, 파악을 향한 집착으로 나아갔다. 사후세계를 감각할 수 없는 상태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소재는 텍스트였다.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신들과 악마들은 모두 여성의 몸으로 그려진다. 누군가는 군림하는 존재로, 누군가는 처벌받는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전통적인 종교 도상의 이분법인 선과 악, 흑과 백의 구조는 이곳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작가가 다루는 종교 중에는 명확한 심판의 과정이 없는 것들도 있고, 아직 재현되지 않는 텍스트이므로 선악의 기호적 구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끼로 목을 내려치는 회화 역시, 그것이 심판인지, 형벌인지 혹은 다음 단계로 가는 과정의 일부일지 알 수 없다. 사후세계는 그러한 가능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작가는 물감이 스며드는 장지에 아크릴 과슈로 점을 찍는다. 점이 잘 보일 수 있도록 보색을 교차시키기도 한다. 붓으로 그린 그림은 상과 상 사이를 가로지르며 면을 나누지만, 점은 대상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한다. 틈은 조밀한 점과 여백의 단위가 비집고 들어가며, 존재의 피부와 체온을 상상의 영역으로 남겨 둔다. 각진 사물이 아닌 빼곡한 입자로 표현된 점묘화는 김모연이 표현한 악마와 천사, 신과 인간, 심판과 과정의 체계가 삭아든 세계로 진입한다.


미지의 형상
 전시의 제목인 《Styx》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저승의 마지막 강을 뜻한다. 이 강은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경계이자 죽음 너머로 가는 관문의 장소이다. 스틱스 강을 넘게 되면, 다시 이전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신화는 죽음 너머의 세계를 어두운 미궁의 환경으로 만들어 둔다. 하지만 작가의 회화는 사망의 공포나 알 수 없는 곳을 향한 두려움을 쪼갠다. 우리 삶과 비슷하게 현현된 낯선 장소를 찍어 낸다.
 한편으로 그림의 존재들은 외계에서 온 존재 혹은 미래의 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의 회화들은 단순히 종교화라기 보다는 사변적 상상력을 내재한 것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사후세계(종교), 먼 미래, 외진 행성부터 기원전의 아득한 세계까지, 가늠할 수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시작은 그 순간의 몸과 정신이었다. 기술의 발전은 우리를 과거의 사람들과 분리시킨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기술이 만든 거대한 세계관 속에서, 죽음이라는 미스테리를 현재의 몸으로 감각하고 이해하려 애쓸 뿐이다. 그 원시적인 질문과 해답은 원을 그리며 다시 이곳으로 도착한다.

이유빈 《내 옷장 안의 용》 전시 서문




2026.04.25. - 05.17.
예술공간 의식주,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80 2층

작가: 이유빈
주관 및 주최: 예술공간 의식주
기획 및 서문: 강다원
포스터 디자인: 이혜지
후원: 202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주체






#연결과 열림

 ‘매개’를 언급하기가 조심스러울 정도로, 우리는 매개라는 단어를 자주 어렵지 않게 사용한다. 그러나 매개가 두 가지 이상의 사물, 사건, 인간, 심지어 시공간의 중간 지점의 연결고리를 의미한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이 폭넓은 단어를 적재적소에 활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더불어 매개는 ‘medium’으로 번역되고, 이는 ‘materials’와 함께 물질적 재료를 영문으로 쓸 때 가장 많이 사용된다는 사실은 단어를 점점 더 남용하게 한다. 예술에서 매개는 머릿속 생각을 인지할 수 있는 존재로 발현된 것으로 넓게 언급되며, 사물, 소리, 빛, 인간의 동작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인 것이다.
 이유빈이 전시 공간에 가져다 둔 사물들에 대하여 매개라는 모호한 단어를 쓰는 데에는 분명함과 조심스러움이 공존한다. 이곳의 작품은 작가의 의문과 태도를 전달하려는 매체가 된다. 그러나 세밀하게 전시를 감상하다 보면, 작가 본인이 특정한 질문을 전달하고 그 궁금증을 실제 대상에 투영하려는 매개자임을 알 수 있다. 무수한 매체의 의미들 사이에서 좀 더 집약적으로 이 현장을 바라본다면 어떤 태도를 도출할 수 있을까. 어쩌면 엉성하게 보였던 복수의 사건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관계를 도출하는 것이 매개의 역할 중 하나일 수 있다. 엉성하고 인과적이지 않아 보이는 두 사건을 떠올려 보자. 두 사건은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벌어졌고 등장하는 사람들도 서로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이 독립된 환경이 어떤 계기로 인해 연결되었을 때, 그리고 특히 정치적인 역학 관계에 놓여 있을 때 종종 ‘커넥션’이나 ‘게이트’¹라는 명칭을 덧붙인다. 마치 연결로 인해 새로운 해석의 문이 열리는 과정인 것처럼 말이다.


#풍경이 삼킨 개인

 취미와 노동, 수작업과 자동화, 기계와 영혼. 이유빈은 대척점에 놓인 영역의 틈에서 그 간극을 좁히는 사물을 통해 벌어진 시공을 접촉한다. 작가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작동하고 있으며, 안전해 보이지만 멀리서 보았을 때 실체 없는 불안을 일으키거나 의심의 징조가 되는 환경이다. 그중에서도 이유빈은 오늘날의 자동화 기계를 만들기 위해 동원되었으나 지금은 잊힌 노동자들을 포함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영혼의 힘을 투영시키는 사물들과 같은 소재를 환기하면서 일견 자연스러운 현재까지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 잊힌 노동자들은 역사적으로 기록될 필요가 없기에 잠들어 있으며, 견고한 성물은 사실 그것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을 피하고자 거듭 허울뿐인 의미를 부여하는 사물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확언의 역사나 믿음은 반대의 의견을 고립시키면서, 언젠가는 터질지 모르는 의심을 잠재시킨다. 이유빈은 믿음과 불신, 기록된 역사와 휘발된 기억이라는 대척점을 매개하며 잠든 요소들을 꺼내 놓는다.
 〈Pattern Recognition-Phase 1: Automas〉와 〈Pattern Recognition-공과 공〉은 19세기 하버드 대학교 천문대에서 단순 계산을 위해 저임금으로 고용된 여성 노동자 혹은 1970년대 한국의 산업화 시기, 가발 공장 여공들의 사진에서 출발한다. 오래된 사진을 통해 반복적으로 소환되는 위대한 인물들은 그들의 초상과 이름들로 함께 호명되지만, 이유빈이 자수로 새긴 이미지 속에서 노동자들의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무명의 행위자로 가득한 외피의 이미지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집약적이고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섬유 제작의 노동이 밀집된 결과다.
 스킬자수는 1997년 고시되어 2000년에서 2013년까지 적용되었던 7차 교육과정의 실과에 포함된 수업이다. 이유빈은 과거 실생활 능력 향상을 위해 배웠던 스킬자수의 방법이 사실은 1960~70년대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한 가발 공장에서 이루어진 가발 생산 방식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여가와 취미로 인식되었던 스킬자수를 과거 고된 노동 환경의 역사와 연결한다. 시차를 두고 벌어진, 직접적인 경험과 간접적인 역사는 스킬자수를 거쳐 엮인다. 
 〈CQ〉는 비밀스럽고 소중한 자료를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작가가 이 오래된 책상을 불러 와 새긴 것은 모스부호인데, 이것은 앞의 자수 작업과 마찬가지로 세계대전 때 모스부호로 암호를 수발신한 여성 송수신자(무선사)의 존재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비공식적인 암호를 전달하기 위해 동원된, 실제로 살아 있었던 노동자들의 존재처럼 비밀의 책상은 반쯤 열려 있다.
 한편, 실체 없는 종교와 신념을 향한 믿음으로 가기까지의 여정을 떠올려 보자. 사람들은 오랜 역사가 전해온 이야기를 복기하면서 특정한 사물에 이야기를 대입시키거나, 희귀한 물체에 숭고함을 부여한다. 전시장 곳곳에 비치된 북어와 원석은 죽어 있는 사물이다. 그러나 이미 죽어 버렸기 때문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해도 반박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의문을 제기하고, 말을 걸고, 떠나는 것들은 대부분 살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이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오랜 비밀을 지킬 수 있는 견고한 성물이 될 수 있다. 믿음을 간직한 사물과 함께, 반대로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이는 사물들은 커튼이나 캐비닛에 일부만 가려진다. 여기에는 몇 가지의 관념이 충돌하고 있다. 그것은 액운, 행운, 안도라는 불확정한 상태를 다스리기 위한 실체 있는 사물을 향한 믿음, 그리고 커튼 뒤나 서랍 안에 잠들어 있는 멈춘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현장의 생생한 호기심이다. 하나는 오랫동안 지난한 과정을 겪었으며 다른 하나는 생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사물에 부여하려는 연약한 믿음 사이의 단계는 호기심에 의해 재건되고, 의문에 의해 파괴된다는 점에서 관찰자의 마음속 관문을 계속해서 넘나든다.


#배회하는 영혼

 스킬자수 작업, 낡은 책상과 모스부호, 오래된 사물과 닳은 믿음은 모두 구식으로 여겨진다. 집약적인 노동의 행위와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 언어는 더이상 발전되지 않고 본체를 변형하지 않은 채로 소환된다. 버스 안내양, 전화교환원, 엘리베이터 걸, 사라진 노동자들은 대부분 여성으로 구성되었으며 기술이 자동화되기 전 인간 스위치로 존재했다. 이유빈이 지금의 현장과 연결하는 것들은 대체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면서 눈에 저장하지 않았던 중간 지대의 사람들, 혹은 반대로 무수한 사람들의 이동과 접촉을 통해 형성된 보이지 않는 믿음이다. 
 《내 옷장 안의 용》은 갈수록 축적된 기술이 만드는 매끄러운 효율성, 멈추지 않는 움직임이 남긴 잔재들을 검토한다. 전시의 제목은 칼 세이건의 저서 The Demon-Haunted World: Scient as a Candle in the Dark(1995)에서 제시한 ‘차고 속의 용(The Dragon in My Garage)’에서 출발한다. 옷장은 장르 소설에서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통로로 묘사되고, 용은 상상의 동물로, 전시의 제목은 호기심을 통해 닿을 수 있는 숨겨진 세계처럼 읽힌다. 그리고 이유빈의 시선에서 이 전시의 제목은 효율과 합리가 들어찬 세계(옷장)에서 남겨진 의문의 감각과 흔적(용)으로 번역할 수 있다. 
 우리는 어디선가 들리는, 낡고 반복된 목소리를 미미하게 기억하며 불운을 피하기 위해 미신 행위를 반복한다. 또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생성형 알고리즘 프로그램과 대화한다. 배우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다른 물질과의 접촉은 기억되지 않은 매개로 환원된 현상이 아닐까. 지금 보이지 않더라도 분명히 존재한 매개자들은 영혼의 형태로 지금의 기계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유빈은 베일에 싸인 반투명한 영혼들과 선명한 인간들 사이에 서서 끊임없이 그들과의 연락을 취하고 있다. 




¹ 정치적 스캔들의 용어로 사용되는 ‘게이트(Gate)’는 본래 ‘출구’나 ‘문’을 의미하지만 1972년 미국의 ‘워터게이트(watergate)’ 빌딩에서 일어난 정치적 스캔들을 기점으로 비리 의혹 사건의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다.
박행복 《Graphic Poem》 전시 서문




2026.04.03 - 04.26.
현대미술회관, 부산 수영구 망미동 409-11

작가: 박행복
포스터 디자인: 고등어디자인
전시 전경: 노푸름
주관 및 주최: 현대미술회관 

 

행복에서 행복으로


1. 행복한 이름
 박행복은 어느 날 자신의 이름을 ‘박행복’으로 바꾸었다고 불쑥 말했다. 본인을 박행복이라고 처음 소개했을 때는 작년 무렵이었다. 단단하게 들리는 성 ‘박’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결합해, 작가에게 행복이 더욱 밀착된 듯 보였다. 그러나 행복은 누구에게나 허용되어 있지만 언제나 느낄 수 없는 드문 사건으로 느껴왔다. 주변의 사람이나 사물이 촉발해야만 비로소 성립되는 공식처럼.
박행복은 정말로 행복을 그리겠노라 선언하는 작가가 된 듯, 행복 그 자체의 인간이 되었다. 그는 행복을 갈망하거나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오롯한 행복을 여실히 그려내는 이였다. 그렇게 박준형은 박행복이 되었고 비로소 자신의 그림과 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언어를 찾게 되었다.
 박행복이 되기 훨씬 전부터 그는 본인을 ‘화가’로 소개해 왔다. 우리는 화가라는 단어를 들으면 캔버스 앞에 붓을 들고 옷에 물감이 잔뜩 묻은 인물을 쉽게 떠올린다. 그게 바로 박행복이다. 화가라는 관념은 박행복의 이미지에 포개어지고 박행복은 화가로 불린다. 그는 거의 매일 손바닥만 한 드로잉북에 연필이나 펜으로 드로잉을 하고, 작업실에서는 팽팽하게 짜인 캔버스 천 위에 물감을 올린다. 대중교통을 오가는 사이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만 휴대폰을 활용해 드로잉할 때도 있다.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유통되었던 2012년 경 작가는 디지털 드로잉을 해왔지만 본격적으로 재개한 것은 ‘글자 그림’을 시작한 다음 부터다. 그의 글자 그림, 즉, 글을 그리는 행위는 캔버스나 종이 위의 격자를  메우는 여정의 반복이다. 그러나 우리가 습관처럼 사용하는 한글을 획으로 ‘쓰는’ 것이 아닌, 글을 ‘그린다’는 행위는 언어의 체계와 한글 표기법에 몰두해 가며 캔버스 프레임 속으로 들어 가는 지난한 과정을 포함한다.

2. 글자를 그리는 일
 박행복의 전시 《그래픽 포엠(Graphic Poem)》을 본격적으로 살피기에 앞서, 글쓰기라는 익숙한 행위를 떠올려 본다. 처음 한글을 배울 때 우리는 ‘획’을 배운다. 획은 글의 단위를 선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박행복의 그림에서 글을 이루는 단위는 ‘픽셀’이다. 단위가 ‘정도를 표현하는 기준’이라면, 하나의 단어에 얼마나 많은 획이 필요한지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응(ㅇ)’은 한 번의 획, ‘응’은 세 번의 획이 들어간다. 그렇다면 박행복은 이응을 표현하기 위해 몇 개의 네모를 사용하는가. 그는 한 개 혹은 마름모꼴로 배열된 네 개의 네모를 사용한다. 칸을 채우는 동시에 가운데를 비워 두며 글자를 그린다. 이것이 그가 이응을 그리는 방법이다. 언어의 힘이 공유 가능함에서 비롯된다면, 박행복은 글의 힘을 버리지 않고 간직한다. 때로는 형체를 알아내려 한참을 숙고해야 하지만, 어떤 문장들은 명료하게 읽힌다.
 전시 동선에 따라 《그래픽 포엠》을 읽어 내려간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현대미술회관 건물의 초입에는 〈매일 어제는 찾지 못한 가능성을 찾는 일〉이 있다. 이 작품을 비롯한 내부의 회화들은 그 자체로 박행복의 ‘행복한 그리기’를 암시한다. 억지로 행복해지려 되뇌는 최면도, 골똘한 고민 끝에 도출된 결과물도 아니다. 회화는 그림이 표출하고, 글이 서술하는 대로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혹은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향후를 향한 기대를 드러낸다. 전시장 입구에 반듯하게 걸린 이 그림은, 오늘을 위해 작가가 간직해 온 소중한 태도를 꼼꼼히 곱씹게 만드는 안내문이기도 하다.
 박행복은 지난 전시부터 꾸준히 작품이 놓일 공간을 작은 목업(Mock-up)으로 제작해 왔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목업을 쌓는 행위는 ‘원고지를 만드는 일’¹이다. 선명한 플래시(Flashe) 물감이 덮이기 전, 희미한 흑연이 남긴 격자 역시 원고지를 그리는 과정과 같다. 충만한 내용의 진입을 앞둔 깨끗한 원고지는 작가에게 전시를 구상하고 글을 그리기 전 준비 단계다. 글이 쓰일 종이를 만드는 과정은 생경하나, 박행복은 입체적 공간과 평평한 대지라는 두 개의 밑바탕을 구축하며 그림이 남길 자리를 차분히 마련한다.
〈삶에서 삶으로〉는 목업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현대미술회관이라는 공간의 여백을 고민한 작품이다. 이 작업은 건물의 구조에 맞추어 설치되어, 관객이 문을 사이에 두고 안팎을 넘나들며 감상하는 동선을 유도한다. ‘삶에서’가 설치된 장소는 작품을 미결의 상태로 남겨 둔다. 박행복은 하나의 방에 각각 8개의 캔버스로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여 〈삶에서 삶으로〉를 그렸다. 전시 초입이나 다른 구간에서 하나의 캔버스에 한 단어를 담은 것과 달리, 형태소를 다시 한번 분해한 것이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벽 높이에 맞춰 설치된 그림은 공간의 제약상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관객이 공간을 이동하며 개별 캔버스를 눈으로 더듬는 순간에야 의미가 연결된다. 방을 넘어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문장, ‘삶에서 삶으로’. 이 문장은 관객의 동선과 더불어 조밀한 순간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우리’라는 삶, 그리고 그 삶이 일궈내는 내일의 대지를 드러낸다.
 신체 스케일을 압도하는 〈삶에서 삶으로〉가 있다면, 다른 벽면에는 띄엄띄엄 놓인 〈형용할 수 있/없는〉이 있다. 전시된 모습처럼 이 그림은 두 가지 가능성으로 읽히거나, 두 가지 여지를 모두 품는다. 감상이나 비평을 배제하고 특정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쓰인 글은 그 자체로 고정된 문장이 된다. 그러나 ‘있’과 ‘없’이라는 갈래로 나뉜 이 작품은 ‘글을 그린다’는 역설이 주는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글을 읽을 때 좌에서 우로 이동하던 시선은 ‘있’과 ‘없’에서 급선회한다. 두 글자는 서로의 보색으로 채색되고 ‘수’를 기점으로 작가가 유지하는 규칙이 변주된다. 규칙은 앞 그림의 배경색을 다음 그림의 글자 색으로 채택하며 이어지는데, ‘수’ 이후로 등장하는 ‘는’에는 그러한 규칙의 흐름이 해제되기 때문이다. 관형어 뒤의 명사가 생략된 자리에 관객은 ‘그림’이나 ‘삶’ 같은 단어를 대입하며 작가의 문장을 상상하게 된다. 보는 이는 문장을 맺는 역할을 누리며 그 뒤에 올 무수한 단어들을 연상한다.
〈물질과 행위를 통해 이 순간을 느끼는 일〉은 앞선 작품보다 더욱 작가의 그리기 태도를 명료하게 시사한다. 이 그림은 문장의 작성에 적용되는 약속을 되짚으며 제작되었다. 먼저 전경과 배경색을 교차하는 규칙이 유효하게 작용하여 낱말들이 이어진다. 그러나 각 캔버스는 글을 좌우로 읽는 관습을 비껴가기에, 관객은 부유하는 낱말들 사이에서 쉽게 잡히지 않는 글자 속으로 파묻히게 된다. 작가는 이번에도 현대미술회관이라는 공간의 눈높이와 스케일을 고려하며 메시지를 전송한다. 명확한 문장을 강요하는 대신, 글자와 맞닥뜨리는 그 순간 자체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전시의 시작이자 행복의 초입이었던 〈매일 어제는 찾지 못한 가능성을 찾는 일〉은 전시장 전체에 걸쳐 총 4개의 캔버스에 그려졌다. 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거나 시작과 끝에 배치된 이 작품들에 대해 작가는 "같은 시간대에 볼 수 없는 서로 다른 작품"²이라고 말한다. ‘가능성’에 대하여, 우리의 눈은 한 번에 하나의 그림만을 볼 수 있지만, 3차원을 초월한 세계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무화된 채 나열된 현장이 존재한다. 순간의 가능성을 토대로 미래를 점치는 막중한 선택이 가벼워지고, 무수한 가능성이 공존하는 상태이다. 그곳에서는 어제의 가능성이 다른 방식으로 해결된, 한결 가벼워진 오늘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4점의 회화는 '시리즈'라는 말로 묶이지 않는 개별적 가능성으로서 전시장 곳곳에 위치한다. 변주된 가능성은 유일무이한 다수의 해결책을 남긴다. 마지막은 다시 처음으로 연결되며 가능성을 좇는 하루가 반복되는 매일을 상기시킨다.

3. 쉽게 쓰여진 네모
 작가의 이름이기도 한 ‘행복’은 ‘찾는다’라는 서술어와 만날 때 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이는 행복이 보편적인 감각이면서도, 누구나 쉽게 도달할 수 없는 희귀한 영역에 머물러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굳이 애써 찾지 않아도 편안하게 읽히는 그의 문장들은 일상 저변에 스며든 생각이다. 그리고 분절된 형태소와 격자 사이로 관객의 시선이 머물며 문장을 재구성하는 과정은 각자의 운율을 만드는 일과 닮아 있다. 박행복의 화면이 단순한 그래픽을 넘어 시(Poem)로 치환되는 지점은 이곳에 있다. 낱말 사이의 여백과 색채의 변주는 리듬을 만들고 캔버스 표면 위 시로 등장한다.
 누군가에게 이 전시는 '행복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면 어떨까. 그럼에도 전시는 무리 없게 읽힌다. 사람들 사이 평화가 깨지고 삶과 행복에 관한 실존적 의문이 인간을 뒤흔들던 시기에 행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열히 획득해야 하는 상태로 여겨졌다. 행복이 아직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 대신, 행복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냐에 관한 다소 비극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전시 바깥에서 이루어졌던 그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작가는 구태여 행복을 형상화하려 애쓰지 않고 누구나 쉽게 내뱉고 접할 수 있는 말들로 이루어진 삶을 차분히 걸어 간다. 명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쫓는 대신, 작가는 프레임 안을 나누고 채우며 화면 내부에 몰입한다. 타인을 의식하거나 외부를 참조하지 않고 오직 작가 자신으로부터 발화된 글과 그림은 지극히 친절한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행복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메마른 축 위에서 그의 회화를 다시 본다. 낯설지 않은 감각, 애써 꺼내지 않아도 늘 곁에 있는 마음. 이곳에서 적어도 행복이란 픽셀로 정성껏 그려낸, ‘쉽게 쓰여진 시’와 같은 박행복의 그림이 아닐까.




¹ 작가와의 대화, 2026. 03. 12.
² 작가와의 대화, 위와 동일
이정빈 개인전 《그린 듯한 그린》 리뷰




2025.11.01. - 11.16.
예술공간 의식주,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80 2층

작가: 이정빈
그래픽 디자인: 마카다미아 오
서문: 박소호
기록: 정지필
후원: 서울문화재단 2025 청년예술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


이정빈의 서체를 근면하게 탐색하기



1. 
 이정빈의 개인전 《그린 듯한 그린》의 작품은 명확한 정의를 유예시킨다. 그의 회화가 녹색(Green)보다 노란색에 가까워 보이는 것 같아도, 작가가 사과를 그렸음에도 모과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이정빈의 회화는 전체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를 그린 듯, 사과 혹은 모과, 초록 또는 노랑이 될 수 있는 어떤 면(face)을 보여 준다.
 ‘전시 보기’라는 경험을 복기하며, 이정빈의 개인전이 열렸던 지난 11월 예술공간 의식주에 걸린 초록색의 회화 사이에서 나는 그림의 대상이라는 수수께끼, 혹은 작업의 의도라는 정답을 찾으려고 했다. 작가는 정답 없는 서술형 문제를 내는 출제자와 같았다. 그렇다고 채점을 하는 평가자도 아니었다. 그는 어떤 것의 부품을 것을 던져두고 관조하는 듯했다. 관객은 끊임없이 전시의 주제나 작가의 의도를 파헤치려고 애쓰지만, 이정빈은 정답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함정을 파놓는 사람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정답을 치열하게 알아내는 대신, 시점을 거슬러 이정빈이 어째서 이런 문제를 출제하게 되었는지 파악하려는 성실한 관찰자가 되기로 했다.


2.
 <모래>, <흉골>, <늑골>, <무덤>은 전시장 콘크리트 벽에 수직으로 걸렸다. 간결한 디스플레이는 단단한 뼈를 이루는 입자인 모래가 무덤에 이르는 시간을 암시한다. 흉추를 연상시키는,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연결은 이정빈이 그동안 천착해 온 ‘뼈’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몇년 전, 특정 이미지에 씌워진 가치로부터 탈주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뼈를 선택했다. 온라인에서 관음적 대상이 된 운동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향한 불편함은 조깅하는 뼈의 동작으로 드러났다. 말끔하게 남은 뼈는 성별을 가늠할 수 없게 했다. 또한 전통적으로 죽음과 덧없음을 의미하는 뼈를 통해, 오늘날 성적 기호로 읽히는 몇몇 이미지의 잠재된 폭력을 사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뼈를 그리기 시작한 다음부터 작가의 회화는 골격계 사이, 몸과 몸 주변 환경을 함께 그리는 이차적인 흐름으로 나아갔다. 짧게 언급하자면, 작가는 2020년 경 여전히 관심을 두었던 몸의 움직임 그리고 크로스핏 경험을 다룬 회화를 그렸다. 이 때 뼈 틈새, 신체 사이에는 주변 장면이 침투하였으며, 이는 배경과 대상의 경계가 사라진 빠른 붓질의 회화로 남았다. 
 다시 전시로 돌아가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설치된 네 점의 회화는 이정빈이 과거에 한 획으로 뼈를 그려냈듯, 회화 네 점을 드문드문 걸어 골조를 드러낸다. ‘그린 듯한 그린’의 제목처럼 텍스트의 의미를 비튼 것은 이 작품에도 영향을 준다. 네 개의 작품명 중 ‘모래’는 뼛조각을 가리키고, ‘무덤’은 뼈가 은유하는 죽음을 내포한다. 뼛조각은 모래이기도 하고, 모래는 뼛조각일 수도 있는 등가교환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무덤’이라는 단어는 사건의 흐름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 사이 흉골과 늑골은 정확하게 그의 회화의 위치와 정보를 지시하는 중간 지대에 놓인다. 네 점의  ‘모래’, ‘흉골’, ‘늑골’ 그리고 ‘무덤’은 차례로 각각의 그림에 대입되고, 서사가 진행되듯이 척추의 꼴을 차근히 드러낸다.
 아울러 이번 전시에서는 시제와 동태를 변주한 제목의 작품이 등장한다. <사과>, <모과>, <아무 일 없던 사과>, <썩었고 먹었고 자랐고 그려진 사과>, <먹혔던 사과>는 하나의 소재를 다루지 않는다. 동선의 흐름에 따라 관객이 읽으려 애쓰는 작가의 의도는 배반된다. 이는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비-등방성(Isotrope)을 자아내며, 제목이 지시하는 이미지에 관한 믿음을 어긋나게 한다.¹ 다섯 점의 그림은 뼈에 관한 위의 네 점의 그림처럼, 회화를 따라 연속적인 차이를 만들어낸다. 무심하게 던진 듯한 제목과 표면을 스치듯 덮은 물감은 전시를 넘기며 이어진다. 교본처럼 붙들던 제목을 오래 보다 보면, 우리는 판단 불가의 상태를 마주한다. 여기에서 다시 이미지에 덧씌워진 판단과 평가를 거두기 위해 작가가 그렸던 뼈를 소환할 수 있다. 폴 세잔이 반복적으로 그렸던 사과를 떠올려 보자. 사과는 미술에서 기본적인 정물로 여겨진다. 가장 흔한 과일이면서도 실재를 끄집어내려는 소재로서 사과는 뼈와 같이 기본적인 사물로 쓰인다. 그러나 작가는 사과를 치밀히 해체하기보다는 초연하게 그것의 각도를 비틀고 확대하고 제목을 바꾸면서 사과가 아닌 어떤 것, 그러나 사과가 될 수 있는 무언가를 그린다.

3. 
 제목의 혼란함을 뒤로 하면 자유로운 붓질이 뒤덮인 녹색의 풍경이 드리운다. 여기에서 자유로움은, 명확한 지점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제자리의 움직임에 가까운 상태이다. 자유와 가능성, 열어젖힌 회화, 이정빈의 회화를 관통하는 정서는 이탈의 감각을 일깨운다. 이 그리기는 대상에 가까워지려는 욕망 바깥에서 붓을 들고 캔버스 위에 긋는 움직임을 강조한다. 제목과 텍스트의 의미로 작업을 묶어 두지 않고 그것을 거듭 반전시키며 자유롭게 풀어두었던 개념적 태도는 풀과 꽃을 그린 이미지 위에서 운동한다. 물체보다 물체 뒤에 맺힌 풍경을 그리고, 신체와 배경의 용해를 어지럽게 그린 기억은 실시간으로 대기의 영향을 받는 격정적 장면으로 반영된다. 움직임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고정된 이미지의 연속이다. 그들의 연결이 수평적으로 시간을 만든다면 이정빈의 회화는 수직적으로 겹겹이 포개어지며, 자유로운 붓질로 유영하는 회화로 탄생한다.

 회화를 두고 일컫는 움직임에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회화는 움직임(그리기)으로 만들어지지만, 회화 위에 남은 자국으로 손의 상하좌우 이동을 짐작할 뿐, 한 점의 회화로는 화가의 모든 손기술을 유추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회화는 고정된 사물로 인식되고, 또 전시장에서 성역화된 채 감상하는 태도는 회화를 움직임 바깥의 물체에 가두어 둔다. 움직임을 수반해 만들어졌지만 모든 동작을 낱낱이 드러내지 않는 회화는 꼿꼿하다. 그러니 이정빈의 회화를 두고도 형체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과정으로서, ‘비교적’ 자유롭다고 부를 수 있다. 자유로운 초록의 헤엄을 거쳐 전시의 중반(여기에서 중반은 물리적인 위치와 동선을 동시에 가리킨다)에는 숲을 그린 <두42>가 등장한다. 이 회화는 다른 작품에 비해 꽤 구상적인데, 작가의 시점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초록 풀더미가 우거진 <저녁>과 <뒤피 숲> 그리고 세로형 캔버스에 꽃과 풀이 엉켜 그려진 <두 집 앞>, <Poppies>가 걸려 있다. 이 작업들은 작가가 2024년 임성희 작가와 열었던 2인전 《타법打法》(2024)에서 공개된 바 있다. <저녁>과 <뒤피 숲>에서 작가는 뒤셀도르프의 숲을 그렸다고는 하나, 눈앞에 빼곡하게 들어선 붓질은 마치 잎의 표면을 가까이 확대한 것처럼 보인다. 그 밀착된 시선, 그리고 조금은 떨어져 바라보는 꽃 사이에 있는 <두42>는 전시의 흐름을 환기하듯이 멀리서 그려졌다는 점에서 낯설다. 이정빈은 이번 전시에서 유독 본인이 어떤 것을 바라 보고 있는지, 또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판단을 보류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공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있는 그림은 이 전시에서 작가와 관객의 시점이 일치하는 유일한 지점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여기서 작가는 도구를 이용해 물감을 흩뿌리고 문지르는 신체적 수행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관객은 ‘그려지고 있는 상태’의 에너지를 마주하게 된다. 연속되는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균열 속에서, 이 회화는 이정빈의 그리기-서체를 드러낸다.

4.
 사과, 뼈, 나무라는 ‘기본적’인 존재를 감상한 성실한 탐구자로서, 또 이정빈의 과거를 헤집으며 어떠한 경위로 그가 이러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를 떠올린다. 무거운 불편함은 가벼운 뼈가 되고, 그 뼈는 또다시 캔버스로 해체되어 나열된다. 이정빈의 작업은 명명과 기록이 쌓아 올린 틀을, 기본적인 소재와 텍스트를 활용해 무너뜨린다. 《그린 듯한 그린》에서 이정빈은 그가 본 것, 보려 하는 것, 그리고자 하는 것들을 기본적인 사물 뒤에 둔다. 그 대신, 사과 혹은 모과, 뼈로 읽을 수 있는 형체를 확대하고 거듭 돌려 두며 관객을 성실한 관찰자로 앉혀 놓는다. 하지만 전시에서 우리는 성실함으로 이 전시를 이해할 수 있을지에 관한 의문에 빠진다. 이정빈의 회화를 탐색할수록 어떤 것을 그렸다는 의도를 알아가려는 근면한 시선은 물감과 붓질의 교차에 머무르게 된다. 누군가가 남긴 글의 내용을 파고들려는 관성에서 벗어나 그의 서체에 주목하듯, 이정빈의 도래하지 않을 다음을 기다리며, 물감과 텍스트의 유희를 근면하게 추적하는 것이다.





¹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역, 1997, 동문선, p.85
서지희 《엉망의 명령어》 전시 서문




2025.12.19 - 12.30.
예술공간 [:틈], 서울 마포구 월드컵로 31길 6, B1
(현재: 서울 마포구 망원로 57 2층)

작가: 서지희
포스터 디자인: 김소이
주관 및 주최: 예술공간 틈


따뜻한 그리드
 이탈리아 미래주의 화가들은 근대 도시 환경의 역동성과 빠른 속력으로 작동하는 기계 문명에 반응하며 다수의 회화를 남겼다. 이 시기 회화에서는 고층 빌딩과 터널처럼 도시 안팎을 관통하는 분주한 움직임, 그것이 유발한 인간의 ‘현기증’이 복합적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설립보다, 옛것의 파괴와 재건이 더 익숙하다. 도시 환경은 더 이상 생경한 혼란을 제공하지 않기에, 우리는 도시의 진동과 복잡함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해하며, 급속도로 무너지고 세워지는 도시 안에 자리할 뿐이다. 한 편, 그러한 보편적인 혼란을 향한 민감한 반응으로, 서지희는 불안을 늦추기 위한 섬세한 ‘그리기’를 실천해 왔다.

침착한 색연필
 서지희는 외부에서 침투한 예민함으로부터 작업의 축을 세운다. 그에게 있어 ‘그리기’는 통제할 수 없는 세계를 잠재울 수 있는 혼자만의 행동이다. 감정과 환경의 통제 불능은 섬세하게 다룰 수 있는 재료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2022년 단체전을 전후로 줄곧 색연필을 다루어왔는데, 아크릴 물감도 사용하기는 했지만, 붓보다 경도가 높고 반듯한 선을 그을 수 있는 색연필은 그에게 적절한 도구였다. 색연필을 다루는 수고스러움은 작가에게는 침착함을 연습하는 행위다. 각각의 색 선들이 면을 이룰수록, 작가는 안정의 시간을 보낸다.
 색연필의 반복된 움직임에 앞서, 작가는 대지 위에 통제 불능한 세계를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구축한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되돌리기(Undo)’는 작업 전 스케치를 할 때 가능해지는데, 먼저 작가는 그릴 것을 선정한 다음, 안정적인 구도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친다. 주로 이 안정적인 구도는 9분할된 그리드(Grid) 안에서 형성된다. 아이패드를 활용해 9분할 격자 대지를 설정하고, 직선과 도형을 활용해 그가 본 풍경을 스케치한다. 디지털 기기에서 사용할 수 있는 레이어를 더하고 빼며, 시각적으로 편안한 구도와 색감을 배치한다.
 〈선라이즈〉(2024)는 사방으로 발광하는 햇빛 아래, 낮의 풍경을 위의 방식대로 묘사한 회화다. 사방으로 발광하는 해와 시시각각 변화하는 구름은 직선과 타원이 되어 견고하게 하늘에 걸린다. 도형들은 각 요소(해, 구름, 강물)의 상징을 넘어, 조합되었을 때 익숙한 풍경을 상기시킬 수 있는 모듈처럼 기능한다. 연속된 시선을 면으로 나누고, 작가는 색의 선택과 배치를 고려한다. 프렌치 그레이(French Grey) 톤에 포함된 색연필을 사용하여 균일한 채도로 화면을 만들어 나간다. 조색할 수 있는 물감과 달리, 생산된 색연필의 색채 스펙트럼 안에서 화면을 메워 나가는 것은 그에게 한계가 아닌 안정으로 향하는 길이 된다.
 비교적 가까운 시선에 닿은 사물들을 그린 〈한 접시의 마음〉(2025)과 〈하나씩 빠지고〉(2025) 역시 동일한 과정, 화면을 나누어 안전한 위치를 찾는 과정을 경유한다. 이는 사물을 안전하게 보이게 하는 목적과 함께, 작가 스스로 불안한 상태를 화면 안에서 해소하려는 의도를 동시에 지닌다.

조용한 구조
 〈보행자 구역〉(2025)에서는 그가 바라보는 대상이 인공적인 소재에 가닿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업은〈선라이즈〉(2025) 속 화면의 그리드를 중심으로 풍경을 번역하는 행위보다는, 도시 보행 환경의 표지를 그대로 옮긴 듯 보인다. 일상의 기호화된 표식은 서지희가 행해 온 도형으로의 치환을 상기시킨다. 한편, 이 작업은 어쩌면 이번 전시, 근래의 작업을 독해하기 위한 단초로 읽힌다. 이 회화를 전후로 줄곧 평화로운 풍경이나 사물의 배치, 따뜻한 일상으로 보였던 그의 회화는 감정적 안온함보다는 더 계산된 그리기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풍경이 원형(原形)의 도형으로 표현된 것은 유효하다. 그러나 앞의 작업에서, 작가가 그린 격자 속에 도형으로 변환된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자리했다면, 〈녹색 삼각형과 핑크색 면〉(2025), 그리고 〈격자 내부의 원, 삼각형, 아치〉(2025) 등 장소를 알 수 없는 추상의 그림은 작업 초반 단계의 화면 분배를 전면에 드러낸다. 프렌치 그레이 스펙트럼 내에서 표현된 명암 단계는 서서히 사라지고, 뚜렷한 소실점과 선이 남아 있다.
 소제목으로 참조한 ‘조용한 구조’는 작품의 제목으로, 선행된 변화를 설명하기에 적절하다. 건조한 색연필의 질감, 완성된 회화가 내리쬐는 햇빛, 오래 보아도 안정적인 어느 평온한 하루는 관객에게도 유사한 감정을 전달해 왔다. 새로운 경로를 따르는 회화는, 개인에서 시작된 파동이 치밀한 설계를 거쳐 알 수 없는 장소를 추측하게 만들게 한다. 그리고 여전히 작가는 주된 재료로 사용하는 색연필로 ‘칠하기’의 본분을 충실히 따르면서 면과 면을 선명하게 구분 짓는다. 그림에서 생략된 특정성, 즉, ‘언제, 어디서, 무엇’이라는 정보는 대체 텍스트처럼 지어진 제목처럼, 보편적인 도형과 색채만으로 추려진다.

 서지희의 작품은 분명한 세상에서 기인한 감각에서 출발하였으나, 결론적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형태에 닿는다. 그의 회화는 입,출력 결과를 예상할 수 없는 ‘엉망의 명령어’를 함의한다. 공교롭게도 ‘엉망의 명령어’라는 전시 제목에는 ‘이응’과 ‘미음’이라는 원과 사각의 자음이 거듭 등장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엉망’은 ‘무질서’와 ‘혼란’처럼, 작업의 시작이 되는 일상적 감각으로, ‘명령어’는 그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입력값이라 볼 수 있다.
 작가는 그만의 회화 기법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엉망의 명령어를 반복했으리라 짐작한다. 하나의 패턴으로 작품을 완성하고, 그 일부에서 또 다음 작품을 연장하는 것은 대부분 작가들이 겪는 수고스런 여정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서지희의 회화는 각자에게 주어진 혼란한 환경을 긍정하는 위로처럼 느껴진다. 다시 서두로 돌아가서, 우리 외부로부터 작용하는 현기증을 잠시 내려놓기 위해, 정리된 마음과 고운 색연필로 쌓아 올린 조용한 구조들을 응시하기로 한다.
경진의 하루를 상상하며_
박경진 《untitled: 많은 이름들이 이루는 이야기》를 위한 글





2025. 12.10. - 12. 16.
공간 파도, 서울 마포구 고산7길 23 1층

서문과 글: 강다원
모더레이터: 최수연

Film
글과 출연: 박경진
연출 및 편집: 조한결
촬영: 안성요
촬영팀: 신현하

디자인: 박현지
전경 촬영: 신유진


경진의 하루를 상상하며

 경진을 다시 만난 것은 2024년 겨울이다. 그로부터 6년 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대학생이었다. 몇 년 전 유행하던 휴대폰 카메라 앱의 필터를 끼운 듯한 화사한 기억 속에 경진이 있다. 그리고 경진은 닫힌 필터를 깨고 오늘에 소환된 사람이다.
 2025년의 초입에 경진은 12월에 전시를 열 것이라 말했다. 작가는 경진 하나뿐이었지만, 그렇다고 개인전은 아니라고 의미심장한 단서를 주었다. 이것을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 경진은 전시될 작품이 본인만의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시간이 조금 흘러 이 전시에는 ‘프로젝트’라는 인덱스가 붙었다.
 그는 함께 편지를 쓰자며 제안했고, 나에게는 별도로 서문과 ‘글’을 부탁했다. 작가론도, 전시 평론도 아닌 전시에 필요한 글은 내겐 무거운 과제였다. 이 프로젝트에는 나와 경진이 봄부터 가을까지 동안 주고받은 편지와 서문도 함께 수록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글을 가장 마지막에 붙들고 있다.
 글을 쓰는 11월의 언저리에서 경진과 함께했던 올해를 돌아본다. 글에 덧붙이는 어떠한 수식어도 없이 경진을 쓴다. 필진과 작가, 혹은 기획자와 작가, 미술계 동료를 넘어 친구 대 친구로서 경진을 향한 글을 남기기로 한다. 그리고 그의 하루를 상상한다. 내가 아는 경진에 관한 정보를 나열하고, 또 멀리서 그를 떠올린다. 경진의 하루를 그리기 위해서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서의 경진을 설명할 것인지 필요하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기간 내내 그가 가장 오래 머물렀을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의 올봄 그리고 여름의 불특정한 하루를 떠올린다.

 경진은 서울에서 전주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전주 버스터미널로 이동한다. 미끄러지는 버스에서 그는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친구, 선후배, 동료, 미술계 작가와 기획자들의 전시 소식을 읽는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전시를 열심히 보러 다니는 사람 중 한 명이므로. 서울에 올라오는 날짜에 맞추어 방문할 수 있는 전시를 고른다. 서대문구, 마포구, 종로구, 중구 등 하루에 여러 개의 전시를 둘러볼 수 있는 동선을 계산한다.
 전주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조금 걸은 다음 ‘시외버스터미널’ 혹은 ‘금암동 주민센터’에서 383, 385, 1001, 1002 등의 시내버스를 탄다. 서울에서 그는 기후동행카드 단기권을 구매해 사용하기에, 일반 교통카드로 바꾸어 탑승한다.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팔복예술공장. 이팝나무 철길’ 버스 정류장에 내린다. 정류장에서는 도보로 10분 정도, 한적한 거리에는 공장이 있다. 경진은 인부와 나란히 길을 걷는다.
 작가들 작업실은 레지던시 건물 1층이다. 경진의 작업실에는 넓은 창이 나 있다. 바깥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와 식물들이 우거져 있다. 환한 햇빛이 들어온다. 출입문에서 오른쪽 벽에는 지난날 다녀온 작업 중인 사생이 붙어 있다. 거대한 120호 종이다. 따뜻해지기 전 방문한 어떠한 산의 풍경이다. 마른 바위와 나무가 우거진 풍경이 그려져 있다. 경진은 주로 사생할 때 숲에서 그린 작은 드로잉북을 토대로, 작업실에 돌아와 큰 종이에 다시 그린다. 먹과 아크릴을 사용한다. 야외에서 한정된 재료로 빠르게 그려낸 드로잉은 작업실이라는 여유 있는 환경에서 재구성된다. 작업실에는 시끌벅적한 음악이나 영상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대체로 고요한 음률이 흐른다. 이따금씩 울리는 휴대폰 알람도 기다렸다가 한두 시간에 한 번씩 확인한다. 알람보다 더 자주 커다란 창의 외벽을, 나무는 치고 간다. 경진은 160 중반 정도의 키이다. 그가 남기는 그림은 대체로 경진의 키와 비슷한 크기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찾아오는 저녁에 그의 방에서 다섯 걸음만 걸으면 있는 공용 주방으로 향한다. 냉장고에는 각각의 작가 것을 표시하는 메모들이 가득하다. 경진은 저녁을 먹는다. 공용 주방의 가스레인지를 켜고 간단하게 요리한다. 가끔 다른 작가들이 주방에 와서 말을 건다. 어색함 없이 자연스럽게 대답한다. 왜 이렇게 작업실에 안 나오세요. 요새 전시하시는 것 있으세요. 작업은 잘 되세요. 저녁은 무엇을 드세요. 작가님은 오늘도 OO를 드세요?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간다. 경진은 밥을 먹고 바로 뒷정리한다. 그리고 다시 다섯 걸음을 걸어 작업실로 돌아온다. 이제 햇빛 사이로 비추는 나무의 흔적은 사라진다. 어둠이 땅과 가까워진다. 경진은 그리던 사생을 다시 한번 쳐다본다. 고요한 공기들 사이에 더 그려야 할 부분을 찾는다. 혹은 더 손대지 말아야 하는 영역을 빠르게 물색한다. 그의 옆에는 바퀴 달린 선반 위에 아크릴, 동양화 붓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팔레트에는 그림에 찍힌 것과 동일한 색의 물감이 어지럽혀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칸칸이 들어선 아크릴 물감과 먹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경진은 정리를 잘한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한쪽 벽 가까이에는 통제할 수 없던 물감 방울들이 튀어 있지만. 거대한 창문과 마주 보고 있는 기다란 책상, 그 위에 놓인 지난날의 드로잉북, 사생을 갈 때면 사용하는 팔레트, 그곳에서 주워 온 나뭇가지와 나뭇잎, 솔방울, 돌멩이, 흙은 투명하고 작은 병에 담겨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경진은 이따금 작업을 멈추고 그것들을 다시 꺼내 본다. 가끔은 사생을 다녀왔던 시기보다 훌쩍 지나 수분이 바싹 마른 나뭇잎이 진공의 상태로 그를 응시한다. 여전히 고요한 음. 음악은 없거나, 있을 수도.
 경진은 휴대폰 시계를 본다. 오후 8시가 넘어서면 그는 작업을 정지할 것이다. 아직 하반기의 전시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남았다. 그래도 경진은 왠지 조급하다. 많은 작업을 해두어 그중 몇 가지를 선별하고 싶다. 조급한 마음을 지운다. 다른 작업실의 사람들은 이미 떠났을 수도, 혹은 오늘 오지 않았을 것이다. 레지던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타 지역에서 온 작가 숙소가 마련되어 있다. 경진은 붓을 정성껏 세척한다. 혼탁한 물이 맑게 될 때까지 내일을 위해 오늘을 마무리한다.
 어두운 밤이다. 낯익지만 낯선 두려움이 도는 길을 걷는다. 경진의 숙소에는 일 년 동안만 사용하기 위해 마련된 종이 가구들이 가득하다. 임시라 부르기에 적합한 최소한의 생활용품과 가구 속으로 그는 걸어 들어간다. 센서 등은 인사를 한다.
 경진은 봄에서 여름께 사생할 때면 빠르게 치솟는 해의 시간을 피해 일찍 집에서 나선다. 사생을 갈 때 다른 사람들은 약통으로 사용하는 아크릴 박스에 물감을 준비한다. 뜯어서 쓸 수 있는 드로잉북 한 권도 챙긴다. 작은 찌그레기들을 담을 공병도 여러 개 챙긴다. 튼튼한, 그러나 흙이 묻어 있는 운동화를 신는다. 아침 여섯 시가 되기 전 가뜩이나 조용한 전주의 거리를 통과한다. 전주에 머무는 동안 그는 모악산 사생을 두 번 다녀왔다. 팔복예술공장에서 모악산까지는 거리가 꽤 있다. 문득 나는 그가 레지던시에서 모악산까지 ‘어떻게’ 갔는지 수많은 대화에서 단서를 찾으려 애쓴다. 전주의 ‘팔달로 예술문화회관’ 정류장에서 970번 버스를 타면 한 번에 모악산까지 갈 수 있다. 경진은 970번 버스를 탄다.
 날은 밝아진 지 오래다. 슬슬 더워지는 기분이 든다. 경진은 부지런히 발을 옮긴다. 누구도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숲을 걷는다. 무언가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에 앞서, 정해진 일과처럼 숲의 길을 처리한다. 그 처리의 과정에서 발견하는 것은 의외로 사소한 것들이다. 경진은 그 속에서 산의 능선이나 빽빽한 나무처럼 장엄한 것 대신, 자신이 밟고 선 땅 위에 떨어진 자갈과 이파리들을 그린다. 가져온 플라스틱 팔레트에는 색이 많지 않다. 실제 눈앞에 있는 장면을 그대로 재현한다기보다는 그럴듯한 형체를 만들어 나간다. 드로잉북 위로 한 번 물감이 지나가면 지우거나 바꿀 수 없어서, 그가 남기는 흔적들은 그대로 나뭇잎과 돌멩이, 나뭇가지로 박제된다. 어떤 것을 그려야지, 생각한 다음 발걸음을 멈추고 도구를 꺼내 그림을 완성한다. 약 15분 안에 ‘모든 것’이 끝난다. 그 모든 것을 간직한 한 장의 드로잉은 작업실로 가서 커다란 장지에 옮겨질 것이다. 그러나 경진은 이 숲에서는 그것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 것을 그리기에도 바쁘다. 어제의 여유로웠던 작업실과 달리 이곳은 온통 그릴 것 투성이다. 드로잉북은 이따금 나무에서 떨어진 물방울이나 불현듯 닥친 바람으로 인해 군데군데 구겨진다. 경진은 또다시 걸음을 옮긴다. 발바닥에 닿는 돌의 딱딱함, 흙의 푹신함, 잎의 미끄러움을 연속적으로 느끼면서 나아간다. 경진은 위로 올라가는 것일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시간은 앞으로 흐르는 것일까, 뒤로 흐르는 것일까. 시계를 최대한 보지 않는다면 해의 움직임으로 지금을 가늠할 수밖에 없다. 경진은 땀을 흘린다. 그의 땀은 땅으로 사라진다. 그의 일부는 숲이 된다. 그것을 여러 번 반복한다. 길지 않은 그리기와 짧지 않은 탐색이 계속된다. 정오를 넘긴 시간, 그러나 저녁은 되지 않은 언저리에. 다른 사람들이 주로 숲에 머물지 않은 평일에 그는 산을 벗어나기로 한다. 언젠가 또 다른 전시를 위해 모악산을 찾을 수도 있겠지. 경진은 그런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그는 같은 땅을 밟을 수 없다. 오늘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사생을 한 날 경진은 다시 같은 길을 되짚어 작업실에 돌아 온다. 정확히 같은 길은 아니지만, 똑같은 정류장에서 같은 이름의 버스를 타고 전주에 돌아 온다. 작업실에서 그는 다시 정리를 한다. 그에게 하루 사생의 정리는 무엇일까. 먼저 드로잉북을 제자리에 놓거나, 혹은 드로잉북을 다시 연다. 낱장으로 뗄 수 있는 종이를 묶음에서 분리한다. 그리고 소중한 물건처럼 넣어 온 유리 공병들을, 그들과 비슷한 처지의 병에 가까이 둔다. 오늘의 사생 기록이니 메모를 철저하게 남긴다. 흐트러진 드로잉들을 민감하게 정돈한다. 하나의 의식처럼. 오늘은 사생을 다녀왔으므로 작업실 벽에 걸린, 그의 시선에 닿는 큰 장지 작업은 미루어 둔다. 경진은 피곤하고, 또 숙소로 돌아가고 싶다. 어제와 같은, 정확히 같은 길은 아닌 공장 단지를 지나 숙소에 도착하면 해는 이미 넘어간 다음이다.
 경진은 그러한 하루를 수십 회 반복한다. 드문드문 가는 서울, 그곳에서 열리는 아는 이들의 전시, 혹은 본인이 참여하는 전시는 요철 같다. 그는 서울에 올라올 때면 사람들을 만나 대화한다. 작업실 혹은 숲에서와는 다르다. 전주에서 대화의 대상은 이전의 드로잉이나 지금의 그림이다. 그는 그림으로 응답한다.

 서울 동대문구의 좁은 집에서 경진의 하루를 상상한다. 경진 혼자로 만들어가는 빈틈 없는 하루가 벌어진다. 12월의 어느 프로젝트는 빼곡한 날-섬유를 뜯는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 경진이 그동안 산과 작업실로 축약되는 하루를 되풀이하는 동안, 그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지. 그의 감정을 잠시 고민한다. 나열하며 외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의 하루는 통화연결음만 흐르는 전화 부스같다. 그와 편지를 주고 받은 7개월, 그리고 처음 전시를 열겠다고 말한 올해 초, 혹은 그 훨씬 전부터, 시간을 거슬러 다시 오늘까지 경진의 하루에는 사생이 침투해 있다. 편지의 끝에서 나는 경진을 두고 동료애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먼 곳에서 글로 나눈 응답을 기억한다. 어쩌면 미술을 붙든 채 통화연결음만 듣는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면서, 오래 염원하는 어떠한 답변을 함께 기다리기로 한다. 나 또한 경진의 다음 회신을 기다리며, 마침표.
박경진 《untitled: 많은 이름들이 이루는 이야기》 전시 서



2025. 12.10. - 12. 16.
공간 파도, 서울 마포구 고산7길 23 1층

서문과 글: 강다원
모더레이터: 최수연

Film
글과 출연: 박경진
연출 및 편집: 조한결
촬영: 안성요
촬영팀: 신현하

디자인: 박현지
전경 촬영: 신유진






찾아 오신 분께

 추운 날씨에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박경진 작가의 개인전 《untitled》에서 여러 글을 남긴 강다원입니다. 이 편지가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여러분이 서 계시는 이곳, 노고산동의 공간 파도에 전시된 작품을 안내하는 글이 되기를 바랍니다.
 전시장에 방문해 주신 분 중에서는 경진 작가를 이미 알고 계셨던 분들도 있을 테고, 처음 작품을 실견한 분도 있겠습니다. 혹은 SNS로 작가의 회화를 접해, ‘사생’이라는 키워드를 어렴풋이 기억하실 수 있겠지요. 어떤 분이 찾아오셨든, 혼자만의 사생에서 출발하여 여럿이 만든 이 과정의 끄트머리에서 여러분을 기다렸습니다.
 올 초부터 작가는 전주 ‘팔복예술공장’에서 레지던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도 답사를 통해 사생을 진행해 온 작가는, 전주로의 이동 이후로도 작은 아크릴 팔레트와 종이를 들고 산을 찾곤 했습니다. 레지던시를 시작하고 몇 번의 단체전에 참여하면서, 작가는 태어나고 자란 강원도나 수도권을 넘어,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사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2025년도의 사생 기록을 다루지만, 그 결과물만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사생은 왠지 ‘사색’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해, 고독하게 숲을 누비고 그림을 남기는 혼자만의 시간을 간직한 듯 보이는데요. 경진 작가는 사생에서 시작해 전시로 이어지는 기나긴 호흡을 느리게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지금부터 남길 이야기는 이 공간 파도의 벽과 바닥에 놓인 사물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설명입니다. 또 작가가 설계한 느린 숨을 여러분과 나눌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고요.
 먼저 ‘공유지도’를 설명하려 합니다. 눈치채신 분도 있겠지만, ‘지도’는 작가의 지난 개인전 제목에도 등장한 단어입니다. 그에게 지도는 실제 장소를 축소해서 기호화한 사물이 아닌, 사생일지와 현장에서 보고 느낀 주관적 심상이 결합된 것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지도는 전시 장소-지점에서 전시-목적을 실천하는 여정의 은유이기도 합니다. 내가 선택한 목적지와 지점으로 맞춰진 오늘날의 지도가 아닌, 12월 10일에서 16일까지만 공개되는 제한된 지도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전시와 연관된 몇몇 사람을 제하고, 전시장의 문은 단 다섯 날만 열려 있습니다. 가끔 전시를 비일상적인 사건, 목표, 혹은 구체화되는 꿈으로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전시는 특별한 행사이자 다음 프로젝트의 약속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전시라는 지도 그리기에 동원되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untitled》가 오랫동안 고대하던 목표가 아니라, 바다 깊이 있던 생물들을 뜰채로 건져 올리는 행위 같다고. 그러므로 뜰채가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생물들은 물속을 유영하고 있겠지요.
 공유 지도는 우리에게 익숙한 기호화된 평면이 아닙니다. ‘지도를 공유하는 것’, 혹은 ‘공유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지도’처럼 작가의 시선에서 출발해, 그 길을 따라가지만, 과정에서 맺히는 여러 시점을 떠안을 수 있는 너른 지도가 될 수 있습니다. 사적인 행위였던 작가의 사생이 어떻게 공유되고 각각의 지도로 펼쳐질 수 있는지. 덧붙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 전시 공간이 하나의 펼쳐진 지도라면, 그 지점들에 대한 각주일 수도 있겠습니다.


1.
 공간 파도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면 사생 현장에서 모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작가가 사생을 떠나기 위한 아침의 채비, 장면이 남긴 자취, 장소에서 떠올린 조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빼곡히 들어있는 것은 분주한 하루입니다. 겨울날 바싹 마른 나뭇잎이 덮고 있던 눈의 결, 축축한 여름날이 드리워진 종이, 빛이 나무 사이를 침투하는 어느 날의 사진 기록, 그 전체의 풍경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어느 껍질과 잎사귀. 그리고 그것에 겹친 작가의 말들로 느리게 흘러가는 계절을 감지하게 합니다. 사진 위에 덮인 글은, 사진이 말하지 않는 어떤 순간의 기억을 포갭니다. 유리병과 액자에 담긴 숲의 조각들은 풍화되고 밟힐 운명이었던 사소한 물체들을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작가는 전시에서 그들을 가지런히 배열하며, 잔재들에 이름과 의미를 붙여 줍니다.


2.
 전시 공간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메아리를 듣기 위해〉(2025)는 전라북도 김제시와 완주군을 가로지르는 호남의 산입니다. 작가는 각각 4월과 9월, 두 번 모악산 사생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작업실로 돌아와 가로 131, 세로 194cm의 거대한 종이에 모악산의 바위 그리고 그 기운을 옮겨냈습니다.
작가는 자연의 변질을 재현하기 위해 사생합니다. 숲속의 나뭇가지와 솔잎, 덤불이 겹쳐 있는 장면을 선으로 옮겨 냅니다. 빛과 명암으로 이루어진 사실적 묘사 대신, 선과 색이 종이 위에 옮겨지며 특정 장소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 구현되는 것입니다.[1]
 〈메아리를 듣기 위해〉는 올해 9월에 찾은 모악산의 바위를 그린 그림입니다. 거친 바위의 결을 따라 채워진 초록색의 이끼는 이불처럼 덮여 있고, 아직 가을이 채 찾아오지 않은 푸른 숲속에 자리합니다. 사생 회화에서 초록과 회색은 서로 엉겨있고, 갈색의 나무는 그 틈을 비집고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바위가 나무 같기도 하고, 나무가 바위 같기도 하죠. 여름에서 가을로의 변화는 차가워지는 바람의 온도로 느껴집니다. 꼭 눈에 보이는 가을의 색으로 표현되지 않더라도, 천천히 불어오는 선선한 공기의 흐름, 그 공기가 닿는 나뭇잎의 흔들림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환절기의 모악산은 그렇게 여름에서 가을 사이, 머금었던 물기를 증발시키는 거대한 바위와 잎 위로 떠오릅니다.


3.
 단상을 올라와 왼쪽 벽입니다. 저는 경진 작가와 4월부터 10월까지 총 일곱 번의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 편지는 계절을 가로질러 겨울까지 닿는 길이었습니다. 4월의 첫 편지에는 아직 사무적인 문체가 남아 있습니다. 날씨가 무더워지고, 또 선선해지면서 말투도 부드럽게 바뀌었지만요.
 이 편지는 목적지 없이 풀만 치워진 산길 같습니다. 한 달에 한 번 편지를 주고받다 보니 생긴 희미한 길목 같은 것일까요. 처음에 경진 작가는 주로 레지던시 생활과 전시 준비를 위한 사생 기록을 편지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서울에 묶인 상태에서 쓸 수밖에 없는 기록들을 남기기로 했었죠. 하지만 편지가 오갈수록 지역의 구분은 사라져, 편지라는 이름을 빌려 할 수 있는 글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열네 통의 편지는 지나고 보니 우리의 나날을 착실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경진 작가는 하나하나의 글 안에 매달 다녀온 장소들을 충실히 기록해 두었습니다. 한 번의 사생 이후 편지를 남길 때마다 작가는 깊은 마음을 함께 실어 보내는 듯했습니다. 마지막에 닿을수록 작가나 기획자라는 역할이 무화되었고, 공개의 사실조차 잠시 잊은 채, 오로지 소통 수단은 편지밖에 없는 사람들처럼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4.
 사생이라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왔던 작가는 이번에 그의 하루를 촬영해 줄 사람들을 산으로 초대했습니다. 영상의 스크립트는 작가가 사생을 위해 숲을 방문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어린 땅’은 숲과 친밀히 지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생을 그리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마치 메아리처럼 어린 날이 되돌아와 산속을 더 깊이 들어가게 되는 작가의 오늘은 메아리처럼 영상 속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많은 이름들이 이루는 이야기’라는 전시의 부제를 망라합니다. 거대한 숲에서 작가의 눈은 항상 그릴 것을 향해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작가를 지켜보는 새로운 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생은 현장에서 그렸던 드로잉과 수집한 사물들, 작업실로 돌아와 다시 기억하는 회화라는 멈춰 있는 사물로 보였다면, 지금 보시는 이 영상에는 9월의 산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작가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남긴 사생은 전시라는 공유 공간에 가닿습니다. 《untitled》에서는 그림에 저장된 사생의 결과가 또 다른 글감이 되고, 다음 과정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제가 경진 작가에게 썼던 편지와 비평이 전시 공간에 저장되고, 그 이후 페인트로 덮이거나 치워지겠지만 공간의 벽에 오랫동안 저장될 수 있는 것처럼, 사라지지 않는 이름들이 이 공간을 떠다니고 있습니다.
 메아리는 나의 입에서 터진 목소리가 산에 부딪혀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2025년의 마지막 달에 다섯 날 동안 열리는 이곳에서, 전시라는 사건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히 오갔던 수많은 메아리를 기억합니다. 이 시간이 지나면 전시는 종료되고 오늘의 이 풍경은 기록으로만 추억하게 됩니다. 그러나 작가의 하루들이 안전히 여기에 도착했듯, 언젠가 이 흔적들이 다른 메아리와 답장이 되어 내일을 기다리게 되겠지요.



2025년 12월
강다원 드림




[1] 박경진, ⌜현장사생을 통한 사의성에 대한 연구⌟, 2024, 국내석사학위논문 성신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동양화과, 2024, pp.20-22

차현욱 《뜬구름의 무늬》 전시 서문




2025. 11. 22  - 12.07
예술공간 의식주,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80 2층

작가: 차현욱
기획: 박소호
포스터 디자인: 박소호
주관 및 주최: 예술공간 의식주
후원: 서울문화재단 창작예술공간 지원사업, 스트로아트파트너십






차오르는 달
 동양 회화에서는 원형의 달을 공백으로 남기고, 달 주위에 옅게 먹을 칠해 달과 하늘을 표현했다. 이때 먹은 옅은 농도로 종이에 스며 들어, 축축한 구름을 비집고 달이 떠오른 듯 그려졌다. 떠오르는 달을 드러나게 했다.¹ 검게 보이는 하늘은 서서히 종이의 표면에 가라 앉고 무거운 위성은 공중에 신비롭게 걸린다. 흑으로 칠하지 않은 밤의 하늘은 언제나 열려 있다. 
 신비로움. 신기하면서도 묘한, 이해하기 어려운 상태. 오감의 파악 능력 바깥의 현상, 어렴풋한 기억, 그것을 모두 포괄하는 우주라는 시공간은 신비롭다. 수묵에서부터 안채, 호분이라는 전통적인 동양화 재료를 사용하며 차현욱은 오늘날의 풍경을 그려왔다. 차현욱에게 ‘지금’은 고도로 발달된 망원경으로 관측 가능한, 혹은 불가능한 우주이자, 머릿속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는 기억까지 포함하는 그림으로 표현된다. 
 그 시작은 밤이었다. 빛이 사라진 어느 시간, 인간의 눈으로 포착할 수 없기에 상상의 영역으로 넘어간 낮의 기억들은 그 밤에 소환된다. 작가는 선명한 햇살 아래 보였던 낮 이후, 어둠의 시간이 가둔 장면들을 재구성해 화면 위에 옮겼다. 선명하게 보였던 일상이 사라진 대신, 하늘에는 수많은 발광체가 떠다니고 그 물체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공백이 남아 있다. 


허무의 동굴
 전시의 제목인 ‘뜬구름’ 그리고 차현욱이 그려온 밤과 기억, 혹은 상상으로 완결되는 풍경은 우주의 구름인 ‘성운’을 떠올리게 한다. 잡을 수 없어 실체가 없는 것. 그러므로 뜬구름은 허상과 같은 상태로 불려 왔다. 그러나 노자 사상에서 허무(虛無)는 부정적인 것이 아닌 우주의 근본인 도(道) 즉, 무에서 출발하는 미래와 유(有)의 여집합을 의미한다. 우주 역시 완전한 무라고 부를 수는 없는데, 별과 별 사이 여백에는 성운이라고 불리는 가스 덩어리와 티끌, 혹은 성간 물질과 수소로 이루어진 집합체가 관측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운은 밀도와 온도에 의해 암흑부터 붉고 푸른빛의 스펙트럼을 띈다.² 만질 수 없는 공기의 응결로 형성되는 구름처럼, 우주의 성운 역시 구름과 흡사한 형태로 만들어진다. 마치 차현욱이 그린 회화에서 어지럽게 얽힌 물결들이 다채로운 스펙트럼으로 얽힌 형태처럼 말이다.

 일전의 수묵 작업에서 작가는 여백을 남기는 동양화의 기법을 빌려, 그의 회화에서 표현된 요소들을 드러내려는 방법으로 얇은 여백의 선을 남겨두기도 했다. 최근에는 이러한 선의 여백이, 애초에 채색을 시작하기 전 한지에 자국을 내어 그림의 길을 만드는 과정으로부터 파생한다. 이 자국은 대상과 대상 사이를 구별하며, 서로 연결된 통로로 기능한다. 그림 한 켠의 동물이나 인간처럼 우리가 ‘무엇’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형체들도 있지만, 그가 낸 자국의 길은 구름의 경로처럼 흐른다. 채색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러한 경로는 채색을 거쳐 기억의 산수화에 도착한다.


해방의 구름
 원근법에 따른 서구의 풍경화와 달리, 동양의 산수화는 여러 장소에서 관찰자가 바라본 풍경을 종합적(다시점)으로 담는다.³ 이러한 사실을 떠올려본다면, 차현욱의 그림은 특정 장소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진경(眞景)보다는 낮의 기억을 복기하여 재구성한 의경(意景)에 가깝다. 작가의 회화는 낮에는 보이지만 밤에는 그 자취를 감춘 풍경, 그리고 어둠이 숨긴 비밀스러운 지평을 열어주는 문으로 작동한다.

 차현욱은 그러한 문을 그림 속 인물과 회화의 구성으로 은유한다. 인물은 기억의 세계를 열어 연결할 수 있는 주인으로 그림 일부에 녹아 있다. 화면에서는 인물이 거대한 뭉게구름처럼 펼쳐진 세상의 작은 일부처럼 보이지만, 미지의 저편과 감지할 수 있는 이곳을 이어 주는 존재가 된다. 한편, 작가는 대형 캔버스에 그린 풍경을 연상시키는 부분들을〈땅의 조각〉, 〈하늘의 조각〉, 〈사이 조각〉에 퍼뜨려 그리기도 한다. 이들은 전시장이라는 환경에 한 데 놓인다. 작게 그려진 회화들은 하나의 그림을 맴도는 위성처럼 전시라는 궤도 안에 엮인다.

 중력에 의해 지구라는 땅에 발이 묶인 사람들, 우리로 돌아간다. 차현욱의 그림에서 종이에 스며들거나 혹은 그 위로 거칠게 남은 갈필은 가볍게 떠 오른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그리고 그 신비한 너울의 틈에 작은 인간이 숨겨져 있다. 지나간 기억과 현재의 하늘, 미래의 무지로 구분되는 시간의 축은 하나의 그림에서 뒤섞인다. 별은 마지막 순간 초신성 폭발로 잔해를 방출하고 성운의 형태로 관찰된다. 아름다운 장면으로 펼쳐지는 무한한 죽음과 상상할 수 없는 세계, 차현욱은 낯익은 기억의 조합으로 흰 여백 위에 생경한 이미지를 조경하고 있다.




¹  해당 표현은 김두량, 〈월화산수도〉, 1744, 종이에 수묵 담채, 82 x 49.2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참고하였다.
² 한국천문연구원 천문우주지식정보, https://astro.kasi.re.kr/learning/pageView/5199 (2025. 10. 29 접속)
³ 김인숙, 「산수화의 ‘의경(意境)’에 관한 연구」, 『동아인문학』 제38권, 동아인문학회, 2017, p.302
진지현 《깃털과 별과 시간》 전시 서문




2025. 10. 11  - 10. 26
예술공간 의식주,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80 2층

작가: 진지현
기획 및 글: 강다원
포스터 디자인: 박소호
주관 및 주최: 예술공간 의식주
후원: 서울문화재단 창작예술공간 지원사업, 스트로아트파트너십


하늘 천(天)은 사람(大)의 머리 위에 있는 공간을 나타내기 위해 쓰였다. 사람과 하늘, 글자 사이에는 작은 공간이 있다. 획 사이는 땅과 하늘의 경계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를 때 벌어진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사이의 공간에는 ‘공백’보다 ‘여백’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 공백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면, 여백은 무언가 채워지고 남은 빈 곳을 뜻하기 때문이다. 여백을 강조했던 문인화를 떠올려보자. 종이 위를 지나간 한 번의 획을 중심으로 ‘그린 것’과 ‘그리지 않는 것’이 발생한다. 공간의 비워둠은 형상을 드러내 그리지 않은 부분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 회화에서 전통적인 여백은 ‘화면상 표현된 형체 외 비워둔 공간 또는 형체 이외의 요소로 간주하는 부분으로서의 공간’¹으로, 대상과 동등하거나 혹은 더 정신이 깃든 영역을 뜻한다.
 《깃털과 별과 시간》에서는 그동안 진지현이 탐구해 온 회화 기법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그림에는 여백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해와 구름, 발광하는 빛, 새와 다른 존재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배경은 메워진다. 빛과 그림자를 그려야 할 때, 일반적으로 빛은 밝게 그림자는 어둡게 묘사한다면 진지현은 그 반대로 빛을 채색한 셈이다. 또 하나, 이 그림들의 풍경은 일상의 존재를 담고 있지만 역접된 세상처럼 느껴진다. 그림의 장면을 현실 위에 포개어, 투명하기까지 한 청명한 하늘 위를 활주하는 새를 구체적인 동세를 상상한다. 방금의 발상이 아날로그 사진에서의 포지티브 필름(positive film)이라면, 진지현의 회화는 네거티브 필름(negetive film)과 같다.
 작가는 지난날 작은 생명체들을 섬세한 도구, 종이 위에 동양화 안료나 연필, 색연필 등을 사용하여 여린 색채로 표현해 왔다. 길가의 풀꽃과 이파리, 강아지나 고양이와 같은 인간과 가까운 생물들은 작가의 섬세한 그리기로 재현되어 친숙한 온기를 남겼다. 이후 작가는 나무에 인두를 태워 음각 작업을 진행하거나, 건조한 붓에 먹을 묻혀 외곽선을 그리면서 재료 연구를 발전시켜 왔다. 음각 기법과 물기 적은 안료의 결합은 대상을 여백으로 두는 지금의 회화로 이어진다.
 먼저 작가는 스케치한 종이 위에 갈필로 종이를 일정한 방향으로 스쳐 하늘을 채운다. 갈필이 오갈수록 형상은 더욱 선명해진다. 형체를 만들기 위해 어두움을 반복적으로 터치하는 것이다. 안료는 선명하고 단단한 발색으로 장지 위에 내려앉는다. 작가는 하늘, 혹은 대상의 배경을 그릴 때 밝음과 어둠, 맑고 탁함 사이의 스펙트럼이 느껴지는 색을 함께 사용한다. 멀리서 보면 연필이나 색연필 같은 건식 재료로 그린 듯한 회화들은 물기가 적은 갈필로 그려져 배경과 대상 사이의 구분을 더욱 뚜렷하게 만든다.
 전시 공간의 작품들에서는 하늘을 비상하는 새가 어두운 바다속을 유영하는 생물체처럼, 혹은 하늘보다 더 높이 있는 우주 공간을 배회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수직과 수평의 갈필로 짜인 대기라는 배경은 아무것도 만질 수 없는 현실의 공기와는 달리, 장지 위에 건조한 입자로 남는다. 그리고 잡히지 않는 하늘을 촉각적으로 감지하게 한다. 마치 마른 실이 교차된 옷감처럼 작가의 손을 거쳐 교차하는 획은 평평한 대지를 메우고 있다.
진지현이 그린 건조한 회화에서는 시원한 바람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 화면에 채색된 푸른 색감과 상승하는 새, 날리는 깃털에서 비롯된 감각일 테다. 작가의 회화에 등장하는 비행하는 새는 직선으로 난 빛의 길을 따라 상승하고 있다. 지난 회화와 달리, 보다 역동적인 동세를 취하고 있는 새는 지구의 하늘을 넘어 우주를 뚫고 나아갈 기세로 보인다. 실제로 몇몇 그림들에서 새는 점점 더 해나 달 같은 행성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진지현은 자유를 만끽하는 새를 반복적으로 그리며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선 인간의 마음을 새에게 투영시키기도 한다. 그의 네거티브-세계는 동양화에서 전통적으로 남겨 두었던 여백을 채우는 일과 동시에, 일상의 생물을 현실적으로, 동시에 불가능한 자유를 빗댄 것이다.
 〈노을이 물든 구름〉(2025), 〈노을을 지나가는 새〉(2025)를 포함하여, 이번 전시에서는 가을의 공기를 떠올리게 하는 색감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여름의 쬐는 햇빛이 아닌, 청명하면서도 빛바랜 화면은 전시 기간이 통과하는 현재를 환기한다. 그렇게 10월에만 만끽할 수 있는 지금은 화면 위에 겹쳐진다. 〈너머의 곳 1〉(2025), 〈너머의 곳 2〉(2025)은 공간 중앙을 가로 지르며,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 가는 환절기처럼 걸려 있다. 두 회화를 기준으로 좌우에 여름과 가을의 하늘이 펼쳐지고, 전시가 진행되는 10월의 오늘을 회화 위로 겹쳐낸다.
 제목에서 깃털과 별은 진지현의 회화에 등장하는 도상이다. 깃털은 새가 남긴 흔적, 별은 그것을 쫓아가는 새의 목적지를 은유한다. 흔적을 남기며 별을 쫓는 새의 지난한 여정은, 시간이라는 단어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우리 눈에 익숙한 존재들을 따뜻하게 포착했던 진지현은, 위로와 희망이라는 정서를 간직한 채, 갈필로 반복적인 행위를 거듭한다. 한 자리에서 끊임없이 획을 가르는 작가의 손짓은 하늘과 사람 사이의 여백을 지속적으로 메우고, 반전된 필름처럼 가까운 세계를 투사시킨다.




¹ 김인환, 『동양예술이론』, 안그라픽스, 서울, 2003, p.194